• 시집 「님의 침묵」을 읽고 - 이 경(시인)
    글쓴이 운영자

    날짜 14.01.14     조회 325

    시집 「님의 침묵」을 읽고

    이 경(시인)

    님이시여! 님께서도 잠도 깊은 밤의 침묵을 깨고 어두운 시대 속을 왔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야 할 님이 있음을 일깨우러 왔습니다. 일제 탄압정책에 주눅들고 위축되어 수면제 먹은 닭처럼 '살아남기 위해'라는 명목 아래 쉬쉬하며 의분을 삭이고 목소리를 낮추어가던 그 때에, 주권을 잃어버린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시작하던 그 위험했던 순간에,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분연히 일어서 조선천지의 잠을 깨우는 죽비로 왔습니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고 호통치며 왔습니다. 님께서는 그 암담했던 시대에 높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었으니, 일본을 탓하여 원망하기에 앞서 스스로 자존의 힘을 잃고 있는 민족을 걱정하였습니다. "자기를 가난케 하는 것은 다른 부자가 아니라 자기며, 자기를 약하게 한 것도 다른 강자가 아니라 자기며, 자기를 불행케 한 것은 사회나 천지나 시대가 아니라 역시 자기이다. 만일 자기의 권리를 침범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요, 상대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침탈한 것이 아니다." "어느 국가가 자멸하지 아니하고 타국의 침략을 받았으며, 어느 개인이 자모하지 아니하고 타인의 모멸을 받았으며, 자멸하는 국가라야만 타인으로서 모멸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졸음에 빠진 민족을 깨우고 있었으니, 정곡을 때리는 그 말씀들은 시대를 넘어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그것은 님의 사랑이 민족에 국한되는 좁은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만유의 법칙인 자존권의 침해를 막아 인류평화를 바로잡고자 하는 대승적 사랑이었음이며 스스로 세계의 주인이 되라는 깨침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이란 주권과 자존권을 박탈당한 이 민족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생명본래의 법칙에 위배되는 길을 걷고 있던 일본인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님이시여, 우리는 님의 사랑을 민족사랑을 넘어 생명사랑이라 부릅니다.

    지난해 8월 홍성 님의 고향에 만해 추모 사당이 건립되어 첫 만해제를 지내는 날이었습니다. 매미소리가 가마솥의 물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국수를 삶고 막걸리를 넘치게 붓는 그곳 님의 생가, 뒤 울을 타고 내린 칡꽃이 왼 기다림에 지친 여인네의 한처럼 검붉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님의 영정 앞에서 서릿발 같은 광채로 빛나는 안광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히는 화살이었습니다. 그 서늘한 뜨거움은 참으로 기이하게도 나의 피를 끓여대고 있었습니다. 오! 무슨 수로, 무슨 수로 저 사내를…… 그 어떤 미망의 불길이 있어 이 몸 소신공양 올린들 눈썹하나 꿈적 않으시리라. 저 얼음같이 뜨거운 사내를 누가 죽일 수 있었으리. 살아 있어도 이미 생사를 버린 사람을, 죽었다해도 저리 시퍼렇게 살아오는 사람을, 일제의 어떤 총칼이 다시 죽일 수 있었으리요. 고통 속에서 쾌락을, 지옥 속에서 천당을 구하는 사람을, 어느 쇠창살 감옥으로 가둘 수 있었으리요.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집을 짓고 산, 민족이 추위 속에 있으므로 불을 때지 아니한,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자유가 아니었겠습니까? 죽음도 삶도 넘어서 버린 걸림 없는 대자대비행의 실천 그것 아니었습니까?

    님이시여, 간밤에 저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저 아름답고 심오한 시집 「님의 침묵」전권을 다 읽었습니다. 님께서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다'고도 하셨습니다. 그 속에 깊이 감추신 말씀, 조국을 되찾아야만 한다는 강한 의지와 해방을 내다보신 예언자적 통찰을, 민족이라는 피의 전파를 통해 님께서는 송전하려 하셨습니다. 님이시여, 이제 알겠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님께서 왜 홀연히 백담사로 들어가 두문불출 이 시집을 완성하셨던지, 또한 그 시편들이 어떻게 언어 속에서 뛰어넘어 귀기서린 침묵의 향기에 휩싸이고 있는 것인지, 조금 알듯도 합니다. 시집 「님의 침묵」은 조국해방을 불러오는 한 마당 큰 부름굿이었습니다. 존재의 근원을, 생명의 본질을 사랑을 통해 꿰뚫어 보신 님이시여! 목숨의 정수리 끝에서 님께서 부르는 혼의 노래는 기어코 가신 님의 말머리를 돌려놓고야 말았습니다. 하늘도 울릴 사랑의 주문들은 시집 전편에 흐르고 흘러 마침내는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님을 맞이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님은 갔습니다'로 출발하는 그러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로 절망의 끝에서 새로 시작되는 사랑의 의지는 기다리는 나와 가신 님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하나가 됩니다. "아아 님이여 위안에 목마른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그것은 사랑의 여신이 아니라 칼의 웃음입니다. 그 나라에는 허공이 없습니다." 이렇게 님의 등뒤에서 애원도 합니다. 때로는 논개의 애인인 조국이 되어 꽃보다 붉은 한을 어루만지십니다. "용서하셔요 논개여 금석 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용서하셔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라고 하시는 목소리는 가신 님의 결고운 그러나 단호한 그 음성입니다. 님께서는 오실 님의 옷을 지어 놓습니다. 심의도 도포도 자리옷도 지어 놓습니다. 마침내 간절한 목마침의 가락을 넘고 넘어서면 날이 새기 직전의 적막 속에 마치 혼을 건져 인도해 오듯 충정 어린 마음으로 오실 님의 길 안내를 하십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오셔요……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는 물같이 보드랍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죽음의 앞에서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하여 마침내 새는 빛의 반가움은 시집을 끝맺는 「사랑의 끝판」에서 숨길 수 없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녜 녜 가요 지금 곧 가요' 여기에서는 오시는 님과 맞이하는 내가 하나가 되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녜 녜 가요 이제 곧 가요" 님께서는 해방이 곧 올 것이라는 말씀을 이렇듯 명백하게 숨겨놓으시고는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하신 대로 님의 죽음을 조국해방의 바로 앞에다 두셨습니다. 북향집 냉돌 위에서 님께서 홀연히 입적하신 바로 다음해 조국은 큰북을 울리고 태양처럼 왔습니다. 오랜 볼모의 설움으로부터 풀려난 가쁜 걸음으로 왔습니다. 그리하여 조국은 활개를 치며 숨가쁘게 발전가도를 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님이시여, 지금이야말로 참으로 님이 그리운 때인 것만 같습니다. 분단의 아픈 세월 속에서 세상은 올곧은 가치관을 잃어가고 사람들의 눈은 이렇듯 급격히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뻔히 뜬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깁니다. 이런 판국에서는 설사 님을 만난다 한들 원수로 잘못 알아 칼을 들이댈 것이 아닙니까? 님이시여! 지금 우리의 얼을 빼앗고 있는 저 거대한 적은 대체 또 무엇입니까? 그 때는 나라의 주인노릇을 못하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주인노릇도 못합니다. 물질의 풍요는 정신의 나약함과 비굴한 기회주의를 배우게 합니다. 자랑할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할 것을 자랑하는 전도몽상의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아! 조국은 왔지만 진정한 님은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대항해 볼 적 조차 찾을 수 없는 혼미한 상실의 시대!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모르게 엄청난 속도의 회오리 속으로 우리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생명은 스스로 제 목에 칼을 댑니다. 다시 오소서 님이여! 이 시대의 정신 속으로 그 기상 그 확철한 깨침으로 다시 오소서. 지금이야말로 님의 노래가 필요합니다. 님의 사상이 간절하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대기의 혼탁한 오염 속에 급속하게 병들어 가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에 맑은 피를 수혈하십시오.

    시대는 언제나 어둠을 딛고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님의 사상 그 깨우침은 다시 우리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아, 님은 갔지마는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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