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숭열전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 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의 영혼을 함께 모시고 음력 9월 5일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인조 16년(1638)에 지었으며 정조 19년(1795)에 숭열이라고 사액되었다.

    청량당은 이 성을 쌓은 팔도 도청섭인 벽암 각성대사와 함께 이회와 그의 부인의 영혼을 모신 사당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 되어었다. 이회는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 충직한 인물인데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 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진 이후 수어장대 서쪽에 그와 부인의 영혼을 위안할 목적으로 청량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청량당'이란 이름은 서장대가 서 있는 산이 곧 청량산이므로 산명을 당집이름으로 부른 것이며 '청량' 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현절사 건물은 병자호란 후 심양에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비운을 맞은 삼학사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의 영혼을 모신 사당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삼학사는 남한산성이 청 태종의 12만 대군에 완전 포위 당한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최후의 1인까지 끝까지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들이다. 이러한 정신은 의리와 명분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받치는 조선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후에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도 함께 배향 되었다.

    침괘정은 군기 제작소로 알려졌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시진이 중수하고 '침과정' 이라는 편액을 걸어다. '枕戈'(침과)란 戈,즉 '창을 베개삼는다'는 뜻이다. 현재는 침괘정으로 통용되고 있으나 정확한 표기는 '침과정' 이 옳다. 왜냐하면 '戈' 는 '괘' 로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의 호칭대로 적는 지명관례상 '침괘정' 이라 표기 하였다. 건물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양식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이다.

    연무관은 군사들의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무관의 규모는 100평이며, 처음에는 연무당 또는 학무당이라 불리던 것을 숙종이 당시의 수어사 이던 이재호로 하여금 개축케 한 후 연병관이라는 편액을 내렸고 22대 정조때 다시 수어영이라 개칭하였다. 현재 건물의 중앙에 연무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에서 군사들의 훈련과 무술 시합을 열어 뛰어난 무인의 인재를 뽑아 중앙으로 보냈으며 활쏘기 연습을 하던 활터가 있었다고 한다.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고관들이 한유하던 낚시터이다. 건립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의 연못만이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 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이 있다. 정자에는 지수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의 남쪽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성을 관류하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행궁이란 도성 안의 궁궐이 아니라 임금이 거동할 때 머무는 별궁 또는 이궁을 말하며, 조선조의 행궁으로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부안행궁, 온양행궁 등과 함께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 이라 하였다. 이 행궁은 상궐, 하궐로 구분되고 좌전(행궁의 종묘), 우실(행궁의 사직단)이 뒤에 설치되었다. 또 행궁 뒤 언덕에는 숙종때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

    장경사는 성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한는 유일한 사찰이며,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망월봉의 남사면 중턱 곡저부이 완경사면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대지를 구축하였다. 이 사찰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 사찰이다. 사찰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누(鎭南樓),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는데, 그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하게 지어진 고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망월사는 장경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9개 사찰중 가장 오래된 고찰로 망월암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 불상과 금자 화엄경 한벌, 금정 하나를 이리로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4종의 복원된 건물의 규모가 옛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대웅전, 금당, 요사체 2동, 13층 적멸보궁탑과 병풍석은 망월사의 자랑이다.

    개원이란 근본을 새로 시작한다는 뜻, 또는 나라를 세운다는 뜻으로서 신생국가의 연호에 사용되는 예가 많다. 이 절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승군 본영을 두었던 절로서 벽암 각성선사가 조선 8도의 도총섭이 되어 승려들을 지휘하여 남한산성을 축성하였으면, 그후 수도를 방어하는 호국승군의 도장이 되었던 곳이다. 개원사는 창건 이후 의승방번제가 폐지되는 고종 3년(1894) 갑오경장 때까지 270년간 수도 한양을 지켜온 호국사찰로 번창했으며 전국 사찰의 승풍을 규찰하는 규정소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하게 조선 불교의 총본산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