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이 | 연도 | 월 일(양력) | 내용 |
|---|---|---|---|
| 1세 | 1879 | 8.29 |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乙卯, 음 7월 12일) 본관은 청주,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이며, 득도(得度)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卍]海)이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 (方氏). |
| 6세 | 1884 |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움. | |
| 9세 | 1887 | 『서상기(西廂記)』를 읽고, 『통감』, 『서경』「기삼백주」를 통달함. | |
| 14세 | 1892 |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와 결혼. | |
| 26세 | 1904 | 12.21 | 맏아들 한보국 태어남.(보국 내외 북한에서 사망, 다섯 딸을 두었음) |
| 27세 | 1905 | 1.26 | 고향을 떠남.(19세, 25세설도 있음)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월 26일 백담사에서 김연곡(金蓮谷) 스승에게서 득도. |
| 1월 | 백담사에서 전영제(全泳濟) 스승에 의하여 수계(受戒). | ||
| 4월 | 백담사에서 이학암(李鶴庵) 스승에게 [기신론], [능엄경],[원각경]을 수료. | ||
| 29세 | 1907 | 4.15 |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 |
|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백담사에서 하산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일진회 첩자로 오해를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되돌아와 안변 석왕사 등 이곳저곳을 정처없이 전전함. | |||
| 30세 | 1908 |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徐月華) 스승에게 [화엄경]을 수학. | |
| 4월 | 일본의 마관·궁도·경도·동경·일광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 동경 조동종 대학(현 고마자와(駒澤) 대학에서 아사다(淺田) 교수의 주선으로 불교와 서양철학 수강함.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과도 사귀고 10월 귀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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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 건봉사 이학암 스승에게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 | ||
| 12.10 | 서울에 경성 명진 측량강습소를 개설, 소장에 취임(국토는 일제에 빼앗길지라도 개인 소유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자는 이념 때문이었음). | ||
| 31세 | 1909 | 7.30 | 강원도 표훈사 불교강사에 취임. |
| 32세 | 1911 | 1.15 | 박한영·진진응·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체결한 한일불교동맹 조약을 분쇄하기로 함. |
| 3.15 | 송광사에서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서무부장 취임. | ||
| 3.16 | 조선임제종 관장에 취임. | ||
| 5.05 | 조선임제종 종무원을 동래 범어사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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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 동북 삼성을 주유하면서 독립군의 정세를 살피던 중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본 첩자로 오해를 받아 총을 맞고 마취없이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귀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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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세 | 1913 | 5.19 |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 |
| 5.25 | 『조선불교 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 | ||
| 12월 |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 편찬을 계획하고 경남 양산 통도사의 대장경 1천여 부(1,511부, 6,802권)를 열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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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세 | 1914 | 4월 | 불교강구회(佛敎講究會) 총재에 취임. |
| 4.30 |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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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 조선불교회 회장으로 취임. | ||
| 37세 | 1915 | 영남·호남 지방의 사찰(내장사·화엄사·해인사·통도사·송광사·범어사·쌍계사·백양사·선암사 등)을 순례하며 곳곳에서 강연회를 열어 열변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키다. | |
| 10월 |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 | ||
| 39세 | 1917 | 4.6 |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 |
| 12.3 |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동안의 의심스러운 생각들이 환하게 풀리게 되어(擬情頓釋)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 남김. | ||
| 40세 | 1918 | 9월 | 서울 계동 43번지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이 되다(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됨). 동지 창간호에 논설 [조선청년과 수양]·[전로(前路)를 택하여 나아가라]·[고통과 쾌락]·[고학생]을 비롯하여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心)을 발표하다(일반적으로 신시의 선구를 주요한의 [불놀이]로 보지만 만해의 이 [심]은 그보다 1년 앞서서 발표됨).이때부터 더욱 문학 창작에 힘을 기울이다. |
| 10월 | [마(魔)는 자조물(自造物)이다]를 『유심』지에 발표하다. | ||
| 12월 | [자아를 해탈하라]·[천연(遷延)의 해(害)]·[훼예](毁譽)·[무용(無用)의 노심(勞心)], 수필[전가(前家)의 오동(梧桐)을 『유심』지에 발표.중앙학림 강사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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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세 | 1919 | 1-2월 |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관련하여 최린·오세창 등과 조선독립을 숙의.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 삼장을 첨가. |
| 3.1 | 경성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민족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됨. 투옥될 때에는 변호사·사식·보석을 거부할 것 등 투쟁 3대 원칙을 실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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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0 | 서대문 감옥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기초하여 제출.(독립신문 52호 1919.11.4일자에 전문이 게재됨) | ||
| 8.1 | 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 결정 ‘관할위’(管轄違: 본 사건을 담당할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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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 경성고등법원 내란피고사건에 대한 예심판사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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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세 | 1920 | 3.22 | 경성고등법원 예심종결 결정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 재판소로 지정함’ |
| 7.12 | 공판개시. | ||
| 7.16 | 변호사 허헌이 공소불수리 신립(이의제기)으로 폐정. | ||
| 7.17 | 공판중지. | ||
| 8.9 | ‘공소불수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판결. | ||
| 9.20 | 공판개시. | ||
| 9.24 | 공판 4일째 한용운 사실 심문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 | ||
| 10.30 | 경성복심법원 손병희 등 민족대표 48인에 대한 판결. 한용운,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이인환(이승훈), 함태영 등 8인은 최고형인 3년형 받음. | ||
| 투옥 중 일제가 3·1운동을 회개하는 참회서를 써내면 사면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 | |||
| 43세 | 1921 | 12.22 | 가출옥(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김창준 등과 함께 경성감옥에서 같은 날 나옴. 음력 11월 24일) |
| 44세 | 1922 | 3.24 | 불교의 사회화를 위하여 법보회를 발기함.(팔만대장경 번역과 2천년간 조선불교 역사에서 고승대덕의 독특한 학설의 자료를 수집·출판하기 위함) |
| 4월 |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철창철학]이라는 연제로 강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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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 조선학생회 주최로 천도교 회관에서 [육바라밀]이라는 주제로 독립사상에 대한 강연. | ||
| 45세 | 1923 | 2월 |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 |
| 4.18 |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에서 [자조]라는 연제로 청중을 감동시킴.(종로 청년회관) | ||
| 46세 | 1924 | 10.24 | 장편소설 [죽음]을 탈고하다(미발표).이때를 전후하여 민중계몽과 불교대중화를 위해 일간신문의 발행을 구상했으며, 마침 시대일보가 운영난에 빠지자 이를 인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 11.6 | 대한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추대됨. | ||
| 47세 | 1925 | 6.7 |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를 탈고. |
| 8.29 | [님의 침묵] 탈고. | ||
| 48세 | 1926 | 5.15 | 『십현담주해』를 법보회에서 발행. |
| 5.20 |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 | ||
| 6.9 | 선학원에서 6·10만세운동 예비검속으로 구속. | ||
| 12.7 | [가갸날에 대하여]를 동아일보에 발표. | ||
| 49세 | 1927 | 1.19 |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
| 6.10 | 신간회 경성지회장에 당선. | ||
| 7.3 | 수필 [여성의 자각이 인류해방요소]을 동아일보에 발표. | ||
| 8.17 | 회고담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를 『별건곤』지에 발표. | ||
| 12.5 | 동년 경성지회장 사임.(12.3 사표 제출) | ||
| 12월 | 조선불교청년회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칭하고 제자들인 김상호·김법린 등과 일제의 불교 탄압에 맞서서 불교 대중화에 노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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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세 | 1928 | 1월 | 수필 [천하명기 황진이]를 『별건곤』지에 발표. |
| 6월 | 논설 [전문지식을 갖추자]를 『별건곤』지에 발표. | ||
| 7.26 | 『건봉사 및 건봉사 본말사 사적』을 편찬, 건봉사에서 발행하다. | ||
| 8월 | 한용운 아들 보국 신간회 홍성지회 간사로 활동 | ||
| 51세 | 1929 | 11월 | 광주학생의거를 조병옥·김병로·송진우·이인·이원혁·이관용·서정희 등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 민중대회를 열다. |
| 52세 | 1930 | 1월 | 논설 [소작농민의 각오]를 『조선농민』지에 발표. 수필 [남 모르는 나의 아들]을 『별건곤』지에 발표. |
| 5월 |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 | ||
| 53세 | 1931 | 5.16 | 신간회 해소(해체) |
| 6월 | 『불교』지를 인수하여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고 많은 논설을 발표.(6·7월로 합집 84·85호 합집부터) | ||
| 7월 | 전북 전주 안심사에 보관되어 있던 한글 경판 원본(금강경, 원각경, 은중경, 유합, 천자문)을 발견 조사하다.[만화]를 7월부터 9월까지『불교』지에 발표. | ||
| 9월 | 논설 [정·교를 분립하라]·[인도 불교운동의 편신](片信)·[국보적 한글 경판의 발견 경로]를 『불교』지에 발표. | ||
| 9.24 | 윤치호·신흥우 등과 나병 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하다. | ||
| 10월 | 시론 [한갈등](閒葛藤)을 『불교』지에 발표하기 시작하다.(다음해 9월에 끝냄).논설 [중국불교의 현상]·[조선불교의 개혁안]·[불교개신에 대하여] 등을 『불교』지에 발표. | ||
| 11월 | [타이(의 불교]를 『불교』지에 발표. | ||
| 12월 | 시론 [중국혁명과 종교의 수난] 및 [우주의 인과율] 등을 『불교』지에 발표.수필 [겨울 밤 나의 생활]을 『혜성』지에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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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세 | 1932 | 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 |
| 1월 | 수필 [평생 못 잊을 상처]를 조선일보에 발표.[원숭이와 불교]를 『불교』지에 발표. | ||
| 2월 | 논설 [선과 인생]을 『불교』지에 발표. | ||
| 3월 | [사법개정에 대하여]·[세계종교계의 회고] 등을 『불교』지에 발표. | ||
| 4월 | [신도의 불교사업은 어떠할까]를 [불교]지에 발표. | ||
| 5월 | [불교 신임간부에게]를 [불교]지에 발표. | ||
| 8월 | [조선불교의 해외발전을 요망함]을 [불교]지에 발표. | ||
| 9월 | [신앙에 대하여]·[교단의 권위를 확립하라]등을 [불교]지에 발표. | ||
| 10월 | [불교청년 운동에 대하여], 기행문 [해인사 순례기] 등을 [불교] 지에 발표. [월명야에 일수시] (月明夜에 一首詩)를 [삼천리]지에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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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 전주 안심사에서 발견한 한글 경판을 보각 인출(印出)하다(당시 총독부에서 인출비용을 대겠다고 제의해 왔으나 강경히 거절, 유지 고재현 등이 ?출연한 돈으로 간행).이때를 전후하여 일제의 사주를 받은 식산은행이 일본문화정책으로 조선 유명 인사를 매수하기 위한 일환으로 선생에게 성북동 일대의 국유지를 불하하여 주겠다고 했으나 이를 거절함. | ||
| 55세 | 1933 | 유숙원씨와 재혼. | |
| 1월 | 논설[불교사업의 개정방침을 실행하라] 및 [한글경 인출을 마치고]를 『불교』지에 발표. | ||
| 3월 | [현대 아메리카의 종교]·[교정(敎政)연구회 창립에 대하여] 등을 [불교]지에 발표. | ||
| 6월 | [선과 자아]·[신러시아의 종교운동] 등을 [불교]지에 발표. | ||
| 7월 | 『불교』지 휴간. | ||
| 9월 | 수필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를 [삼천리]지에 발표. | ||
| 10월 | [자립력행의 정신을 보급시키라]는 논설을 [신흥조선]지 창간호에 발표.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 이 해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다. 이때 총독부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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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세 | 1934 | 9.1 | 딸 영숙(英淑) 태어남. |
| 57세 | 1935 | 3.8~13 | 회고담 [북대륙의 하룻밤]을 조선일보에 발표. |
| 4.9 |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 (다음해 2월 4일까지 연재함). 이때를 전후하여 대종교 교주 나철 유고집 간행을 추진.(미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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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세 | 1936 | 장편소설 [후회]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이 신문의 폐간으로 50회로써 중단. 단재 신채호의 묘비를 세우다(글씨는 오세창). 비용은 조선일보 에서 받은 원고료로 충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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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6 | 정인보, 안재홍 등과 경성 공평동 태서관에서 다산 정약용의 서세(逝世) 백년기념회를 개최. | ||
| 10월 | 수필 [모종신범무아경](暮鐘晨梵無我境)을 [조광]지에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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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세 | 1937 | 3.1 |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던 {불교}지를 속간하여 {신불교} 제 1집을 냄(논설'[불교] 속간에 대하여'를 발표). 소설 [철혈미인]을 [불교]신집에 연재하기 시작(2호까지 연재하고 중단됨). |
| 3.3 | 광복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셔다 오일장을 지냄. | ||
| 4월 | 논설 [조선불교 통제안]을 [불교] 신집에 발표. | ||
| 5월 | [역경(譯經)의 급무]를 [불교] 신집에 발표. | ||
| 6월 | [주지 선거에 대하여], 수상 [심우장설] 등을 [불교] 신집에 발표. | ||
| 7월 | [선외선](禪外禪)을 [불교] 신집에 발표. | ||
| 8월 | [정진]을 [불교] 신집에 발표. | ||
| 10월 | [불교] 신집에 연재하기 시작(이듬해 9월까지). | ||
| 11월 | [제논의 비시부동론(飛矢不動論)과 승조(僧肇)의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신불교] 신집에 발표. | ||
| 12월 | 논설 [조선불교에 대한 과거 1년의 회고와 신년의 전망]을 [불교] 신집에 발표. | ||
| 60세 | 1938 | 2월 | 논설 [불교청년 운동을 부활하라]를 [불교] 신집에 발표. |
| 3월 | [공산주의적 반종교이상(反宗敎理想)을 [불교]신집에 발표. | ||
| 5.18 | 장편소설 [박명](薄命)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이듬해 3월 12일까지 연재). | ||
| 5월 | 논설 [반종교 운동의 비판]·[불교와 효행]·[나찌스 독일의 종교]를 [불교] 신집에 발표. | ||
| 7월 | [인내]를 [불교] 신집에 발표. | ||
| 9월 | [31본산회의를 전망함]을 [불교] 신집에 발표. | ||
| 11월 | [총본산 창설에 대한 재인식]을 [불교] 신집에 발표. 만단(卍黨) 당원들이 일제에 피검되자 더욱 감시를 받다.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불교사를 정리하려는 구상의 일단으로 [불교와 고려제왕]이란 제명으로 연대별로 고려불교사의 자료를 정리 편찬하려고 자료를 뽑기 시작(미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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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세 | 1939 | 8.26 | 회갑을 맞아 박광·이원혁·장도환·김관호씨가 중심이 되어 서울 동대문 밖 청량사에서 회갑연을 베풀다. 이때 오세창·권동진·홍명희·이병우·안종원 등 20여 명이 참석함.(음, 7월 12일) |
| 8.29 | 사흘 뒤 민족독립운동의 비밀집회장소인 경남 사천시 곤양면 다솔사에서 김법린·최범술 등 몇 명의 동지와 후학들이 베푼 회갑 축하연에 참석하여 기념식수를 함. | ||
| 11.1 | 『삼국지』를 번역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함(이듬해 8월 11일 중단됨). | ||
| 62세 | 1940 | 2월 | 논설 [<불교>의 과거와 미래]를 [불교] 신집에 발표. |
| 5.30 | 수필 [명사십리]가 [반도산하](半島山河)에 수록. 창씨개명에 대하여 박광· 이동하 등과 반대운동을 벌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통도사사적]을 편찬하기 위하여 수백매의 자료를 수집(미완성). | ||
| 64세 | 1942 | 신백우·박광·최범술 등과 신채호선생 유고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하고 원고를 수집. 이때를 전후하여 『태교』(胎敎)를 번역 강의함(프린트 본으로 간행하였으나 현재 전하지 않음). | |
| 65세 | 1943 |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 | |
| 66세 | 1944 | 6.29(5.9) |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 유해는 제자 남정 박광, 해오 김관호 등이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함. 세수 66. 법랍 39. 만해의 친필 원고 등은 남정 박광이 보관. |
| 1948 | 5월 | 만해 한용운 전집 간행위원회가 최범술·박광·박영희·박근섭·김법린·김적음·장도환·김관호·박윤진·김용담에 의하여 결성되어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함. | |
| 1950 | 6월 | 6·25 사변이 일어나 전집간행 사업이 중단됨. | |
| 1957 | 박광이 소장하고 있던 만해의 친필 원고 등을 최범술에게 인계. | ||
| 1958 | 7월 | 만해 한용운 전집 간행위원회 간행위원으로서 조지훈·문영빈이 새로 참가하여 제2차 간행사업을 추진함. | |
| 1959 | 2월 | 고대문학회에서 주도한 한용운 원고 정리작업은 완료하였으나 출판은 미루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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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 | 9.20 | 박노준, 인권환이 『한용운연구』(통문관)을 출간. | |
| 1962 | 3.1 | 박노준, 인권환이 『한용운연구』(통문관)을 출간.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기번호 제25호) 수여. | |
| 1965 | 5.12 | 망우리 묘지 이장과 묘비건립을 논의(선학원)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함. | |
| 1967 | 10월 |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 건립추진회’에서 『용운당 대선사비』를 제작함. | |
| 1970 | 3.1 | 『용운당 대선사비』를 탑골 공원에 세움. | |
| 1971 | 『만해한용운전집』간행을 위하여 신구문화사는 만해 한용운전집 간행위원회에서 수집 보관중인 원고를 인수하고, 김영호의 적극적인 협조로 누락된 원고를 다수 수집하였으며, 최범술·조명기·박종흥·서경보·백철·홍이섭·정병욱·천관우·신동문 등을 위원으로 한 편찬위원회를 구성함.(최범술·민동선·김관호·문후근·이화형·조위규 등이 제3차 간행위원회를 조직함.) | ||
| 1973 | 7.5 | 『한용운전집』 전 6권 (신구문화사) 간행. | |
| 1974 | 만해문학상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제정. | ||
| 1977 | 한보국 북한에서 사망. | ||
| 1979 | 6.29 | 김관호, 전보삼 등이 중심이 되어 신구문화사에서 '만해사상연구회'를 결성. | |
| 9.10 | 『증보 한용운전집』(신구문화사) 간행. | ||
| 12.29 | 망우리 만해묘소에 만해사상연구회 주도로 비석과 상석을 세움.(다음해 3월 1일 묘비 제막식을 거행함) | ||
| 1980 | 6.29 | 만해사상연구회에서『만해사상연구』 제1집 간행함. 그리고 <만해 탄생 100주년 기념강연회>를 조계사에서 만해사상연구회 주최로 개최함. | |
| 1981 | 10.20 | 성북동 심우장에 만해기념관(관장 전보삼)이 개관됨. | |
| 1985 | 만해 동상이 홍성군 남장리 언덕에 건립됨. | ||
| 북한에서도 김일성의 지시로 한용운의 작품을 발굴 소개하기 시작함. | |||
| 1988 | 대한불교청년회에서 독립기념관에 한용운 대선사 기념어록비 건립함. | ||
| 만해 한용운의 문화지도(서울권, 홍성권, 설악권) 제작. | |||
| 1990 | 성북동 심우장의 만해기념관을 남한산성 내로 이전하여 다시 개관함. | ||
| 1991 | 한계전이 중심이 되어 '만해학회' 결성. | ||
| 1992 | 만해 ‘오도송’과 ‘나룻배와 행인’의 시비가 백담사에 세워짐. 만해 생가가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 부락에 복원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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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 | {만해학보} 제 1집이 간행됨. | ||
| 1995 | 제 1회 '만해제'가 만해학회 및 홍성문화원 주최로 홍성에서 열리고 생가지에 만해 추모 사당 '만해사(萬海祠)'가 준공됨. | ||
| 1996 | 만해사상실천선양회(회장, 조오현 신흥사 회주)가 결성됨. | ||
| 8.15 | 대한불교청년회 주최로 독립기념관에 만해어록비 다시 세움. | ||
| 1997 | 11월 | 만해기념관이 백담사에 세워짐. | |
| 1999 | 8.13~16 | 제1회 만해축전 <만해학 국제학술대회>가 설악산 백담사에서 개최됨. | |
| 2003 | 9.23 | 백담사 입구에 백담사 만해마을 개관. | |
| 2007 | 10.19 | 홍성군 만해생가 앞에 만해체험관 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