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과 '님의 침묵'

이경규(동서울대학 광고디자인과 교수)


가끔은 내가 하는 디자인 작업의 물꼬가 막혔을 때 한번 바람이나 쐬러 가야지 하며 사색과 발상의 장소로 아끼고 염두해 둔 곳, 남한산성. 그 산자락에 몸담고 있지만 왜 그리 오를 여유가 없던지, 험한 세파에 쩔쩔매는 386세대의 고단함이 어머니의 치맛자락에서 빙빙 맴돈다.

그러던 지난 가을 드디어 산성에 올라갈 일이 생겼다. 한국 애서가 클럽의 세미나를 남한산성에서 한다기에, 연구실 창문을 열면 보일 듯한 지척이면서도 어느 먼 골짜기 답사 가는 새내기 대학생처럼 들뜬 마음으로 올랐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있어 서울, 성남을 비롯한 그 근처 도시사람들의 소풍 장소로 부담없는 곳임은 물론이고, 높다란 일장산의 능선을 따라 장쾌하게 뻗은 산성의 모습은 멀리서 온 손님을 맞기에도 손색이 없다. 몇 해 전만 해도 성남의 모란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곤 했는데, 최근엔 남한산성 근처까지 지하철이 닿게 되어 마음만 먹으면 식구들끼리, 친구들끼리, 연인들끼리 가볍게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남한산성 입구에 들어서면 계곡을 낀 등산로가 때론 가파르고 때론 완만하게 산성의 남문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무 그늘 밑으로 숨차게 오르다 보니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인 산성의 남문이 눈에 들어온다. 남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산의 능선을 따라 뻗어 올라가는 산성의 모습을 바라보면 왠지 숙연한 마음이 된다. 산성에 올라 멀리 아래를 바라보면 그 고단했던 도시의 모습도 새삼 색다르게 다가온다.

산마루의 주차장 개울을 끼고 돌아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면 한옥의 멋을 살려 지은 3층짜리 만해 기념관이 성큼 다가선다. 그곳은 만해 한용운의 연구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신구대학의 전보삼 교수가 일찍이 만해에 심취하여 30여 년간 모아온 유품과 그 관련자료를 소장, 전시하는 기념관이다. 전혀 인척이나 지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교시절 교과서를 통하여 읽었던 '알 수 없어요'에 정신적 연을 맺어 만해 선생의 사상과 민족관을 후대에 널리 알리고자 결심하였으며, 남한산성에 터를 닦고 손수 집을 지었다 하니 그 정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만해 기념관은 교육장, 전시실, 자료실, 연구실로 나뉘어져 있고, 전시실에는 선생의 관련자료, 문헌자료,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전 교수가 자신의 생명보다도 아낀다는 '님의 침묵'의 초간본은 한용운 선생의 진수가 느껴지는 몇 권 남아 있지 않은 귀중본으로서 보여주는 손길이나 바라보는 눈길이나 전율이 일 정도로 서로 조심스럽다. 평소에는 귀중한 곳에 두었다가 이 책을 보고 싶어하는 관람자가 신청을 하면 전교수가 직접 보여 주신다고 한다.

남한산성-백제, 신라, 조선에 이르는 20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러나 인조가 신하들과 함께 청 태종의 오랑캐에 한 달하고도 달포를 대항하다가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일본의 국권 탈취에 대항하여 민족운동가로서의 절개를 지키며, 한민족의 자존심과 정기를 드높였던 만해 한용운의 기념관을 세운 것은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바쁜 정보들이 여기저기 무선 전파음 속에서 시공간을 넘나드는데, 여기 남한산성엔 님의 침묵만이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