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맺 는 말

    3 1운동에 있어서의 한용운의 역할은 불교계의 대표 이상이었다. 그는 최린과 더불어 이 운동을 선봉에서 주도한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 운동의 모의 초기부터 참여해서 실행 방법을 의논했고, 동지 규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독립 선언서의 작성에 관여하여 공약삼장을 첨가했다. 그리고 백용성을 불교계의 대표로 끌어들였고, 청년 승려들의 협력을 얻어 독립 선언서 3천매를 배포했다. 3월 1일의 독립 선언식을 주재했고, 옥중에서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논설을 썼고, 한시 등으로 동지들을 격려, 고무하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활동을 단순히 천도교의 계획 추진에 협조한 정도로 이해하기란 어렵다. 그는 분명 최린과 함께 3 1운동의 선봉이었다.
    최근 일부의 주장 중에는 '민족 대표 33인은 실재로 민족 대표일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견이다. 3 1운동이라는 용광로에 불씨가 된 것은 분명 이들 33인이기 때문이다. 또 '각 종교를 대표하는 이들이 어떻게 민족 대표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이 국내의 정치 단체는 멸종되다시피 되었으므로 독립운동의 모체로는 종교 단체밖에 없었다는 한용운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분명 한용운은 3 1운동을 선도했다. 그와 함께 3 1운동의 선봉에 섰던 최린은 훗날 변절했다. 그러나 한용운은 최후의 일각까지 불굴의 의지로 투쟁했기에 그가 밝힌 등불은 더욱 빛난다. 3 1 독립 선언서 끝에 붙인 공약삼장은 분명 한용운이 첨가한 것이다. 공약삼장까지도 최남선이 썼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주】 ---------------------------------------------------------------------------------------------

    1) 박노준 인권환, 《한용운연구》, 통문관, 1960, pp.287∼376.
    2) 김상현, 〈한용운과 공약삼장〉 - 《동국사학》 19 20 합집, 1986.
    3) 〈한용운 취조서〉 (1919.5.8.) - 이병헌, 《삼일운동비사》, 삼일동지회, 1966, p.612.
    4) 천도교 장로였던 이종훈(李鍾勳)은 경찰 신문 조서에서 손병희가 주모자가 아니고, 권동진 오세창 최린 3인이 주모자라고 밝히고 있다 (《삼일운동비사》 pp.377 ∼378.)
    5) 권동진은 "동지를 규합하는 것에는 3인 (권동진 오세창 최린)이 협의하고 있었던 바, 나와 오는 천도교측, 최린은 타방면을 권유하여 규합하기로 했다"고 진술했다 (《삼일운동비사》 p.182).
    6) 권동진은 "작년 11월경이라고 생각하는데 조선도 독립하는 것이 가하다는 생각이 있어 이를 동지인 오세창 최린과 상의하고, 3인은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11월부터 12월까지의 일이다"라고 진술했다. (《삼일운동비사》 p.182).
    7) 오세창의 진술에 의하면, 손병희 집에 회합하여 독립 선언의 말이 나온 것은 1월 21일경이다 (《삼일운동비사》 p.515).
    8) 《삼일운동비사》 pp.601∼602.
    9) 《삼일운동비사》 p.606.
    10) 《삼일운동비사》 p.613.
    11) 〈최린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594.
    12) 〈최린 자서전〉 - 《한국사상》 4, 1962, p.171.
    13)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02,606.
    14) 김법린, 〈삼일운동과 불교〉 - 《신천지》, 1946년 3월호.
    15)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02.
    16) 김법린, 〈삼일운동과 불교〉 - 《신천지》, 1946 3월호, pp.75∼76.
    17) 허선도, 〈삼일운동과 유교계〉 - 《삼일운동오십주년기념논집》, 동아일보사, 1969,p.283.
    18) 중제의 표현에는 고루함이 엿보인다. 당시 한용운은 농부복으로 가장하여 곽종석을 만났다는 사실 (김관호, 〈심우장 견문기〉 - 《한용운사상연구》 2, p.283.)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9) 〈한용운 공소공판기〉 - 《삼일운동비사》 p.831.
    20) 임중빈, 《한용운 일대기》, 정음사, 1974, p.103.
    21) 김관호, 〈심우장 견문기〉 - 《한용운사상연구》 2, 1981, pp.284∼285.
    22) 최범술, 〈철창철학〉 - 《나라사랑》 2, 1971, p.81.
    23) 김관호, 〈심우장 견문기〉 - 《한용운사상연구》 2, p.283.
    24) 최범술, 〈철창철학〉 - 《나라사랑》 2, p.81..
    김관호 〈심우장 견문기〉 - 《한용운사상연구》 2, p.283.
    25)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14.
    26)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08.)
    27)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07.
    28)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08.
    29) 《삼일운동비사》 p.603, 616.
    30) 한용운은 훗날 "내가 평생에 좀 통쾌한 일로는 연전(年前) 명월관에서 연설하던 때 일"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 《별건곤 別乾坤》 8호, 1928.)
    31) 김법린, 〈삼일운동과 불교〉 - 《신천지》 1946 3월호, p.76.
    32) 신용하, 〈3 1 독립운동 발발의 경위〉 - 《한국근대사론 Ⅱ》, 지식산업사, 1977, p.88.
    33) 최린, 〈자서전〉 - 《한국사상》 4, 1962, pp.172∼173.)
    34)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p.613∼614.
    35) 〈최린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590.
    36) 최린의 진술에 의하면, 천도교 및 야소교의 거물들이 회합하여 선언서의 취지를 협의한 일은 없고, 대체의 취지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과 자신 등 4인이 협의하여 정하고, 야소교파에는 선언서의 초고를 만든 후에 보이고 합의케 한 것이라고 한다 - 《삼일운동비사》 p.590.
    37) 〈최린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594.
    38)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13.
    39) 〈한용운 공소공판기〉 - 《한용운전집》 1, p.373.
    40)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18.
    41) 홍일식, 〈삼일독립선언서연구〉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p.199.
    42) 김상현, 〈한용운과 공약삼장〉 pp.327∼328.
    43) 박노준 인권환, 《한용운연구》 p.325.
    4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제2권, 1966, p.162.
    45) 조용만, 〈독립선언서의 성립경위〉 - 《삼일운동오십주년기념논총》, 1969, p.221.
    46) 신용하, 〈3 1 독립운동 발발의 경위〉.
    47) 김상현, 〈한용운과 공약삼장〉.
    48) 홍일식, 〈삼일독립선언서연구〉, pp.198∼206.
    49) 〈한용운 공소공판기〉 - 《동아일보》, 1920.9.25. ; 《한용운전집》 1, p.373.
    50) 최남선, 〈내가 쓴 독립선언서〉 - 《새벽》 1955년 3월호 ; 《육당최남선전집》 9, 1974, p.68.
    51)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13.
    52)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18.
    53) 조용만, 앞의 논문, p.221.
    54) 신용하, 앞의 논문, p.87.
    55) 홍일식, 앞의 논문, pp.200∼201.
    56) 김상현, 〈한용운과 공약삼장〉 p.337.
    57) 홍일식은 "2 8 선언문을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한용운이 전혀 우연의 일치로 이처럼 2 8 선언문과 동일한 구조로 3 1 선언서를 만들게 했으리라고 추정하기보다는 2 8 선언문에 의해 받은 생생한 충격과 열의로 즉시 선언서 작성에 들어간 최남선에 의해서 이 같은 구조적 상동성이 가능했으리라는 판단이 더욱 자연스럽기 때문"이라고 했다 - 앞의 논문 pp.205∼206.
    58) 최남선, 〈삼일운동의 현대사적 고찰〉 - 《신세계》 1956년 3월호, p.18.
    59) 〈최린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588.
    60) 〈최남선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61.
    61) 최남선, 〈내가 쓴 독립선언서〉, p.68.
    62) 한용운은 3 1운동 전야인 2월 28일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임진왜란에 국사에 분주하신 서산 사명 등 제사의 법손으로서 우리가 소수로 참가한 것은 유감으로 여기는 바다" (김법린, 앞의 글, p.12.)고 피력한 바 있다.
    63)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02.
    64) 최린, 〈자서전〉 - 《한국사상》 4, 1962.
    65) 〈한용운 공소공판기〉 - 《삼일운동비사》, p.831.
    66) 김관호, 〈심우장 견문기〉, p.283.
    67) 김법린, 〈삼일운동과 불교〉.
    68) 김한기, 〈범어사 사건〉 - 《신동아》 1965년 3월호, p.109.
    69) 〈백용성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138.
    70)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17.
    71) 〈한용운 공소공판기〉 - 《한용운전집》 1, p.373.
    72) 안계현, 〈삼일운동과 불교계〉, pp.275∼277 참조.
    73) 김법린, 〈삼일운동과 불교〉.
    74) 박노준 인권환, 《한용운연구》 p.324.
    75) 고은, 《한용운평전》, 민음사, 1975, p.291.
    76) 이 신문에는 '此書는 獄中에 계신 我代表者가 日人檢事總長의 요구에 응하야 저술한 자 중의 일인데 비밀리에 獄外로 송출한 단편을 집합한 者라'는 편집자의 주가 실려 있다.
    77) 조지훈, 〈민족주의자 한용운〉, 1958 - 《한용운전집》 4, p.363.
    78) 김종균, 〈한용운의 한시와 시조〉, 1979 - 《어문연구》 7권 1호 참조.
    79) 《한용운전집》 1, p.180.
    80) 《한용운전집》 1, p.178.
    81) 《한용운전집》 1, p.175.
    82) 임중빈, 《한용운일대기》 pp.93∼94.
    83) 《한용운전집》 1, p.174.
    84) 김종균, 앞의 논문 - 《한용운사상연구》 p.291.
    85)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11.
    86) 〈한용운 취조서〉 - 《삼일운동비사》 p.620.
    87) 《동아일보》, 1920.8.11. 및 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