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한용운과 최린의 선도

    1〕 3 1운동을 사전에 협의하고 앞장서서 주도했던 몇 분의 지도자 중에서도 한용운과 최린은 주목할 만한 핵심 인물이다. 1919년 당시 최린은 42세였고, 한용운은 41세였는데, 두 사람은 동경 유학 때인 1908년에 만난 이후 12년 동안이나 친밀한 사이로 지냈다. 한용운은 최린과의 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12년 전 불교를 수련하기 위하여 동경에 갔다가 반년 만에 돌아왔다. 최린과는 동경 유학 때 알았고, 조선에 돌아온 후에도 교제하고 있었다.3)

    한용운은 30세 때인 1908년 4월부터 10월까지 일본의 마관(馬關) 궁도(宮島) 경도(京都) 동경(東京) 일광(日光) 등지를 순유하면서 신문물을 시찰하고, 또한 동경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했으며, 일본인 천전(淺田) 교수와 교유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한용운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최린을 만났었고, 귀국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왕래하며 교유했었다. 한용운이 1918년 9월에 간행했던 잡지 《유심 惟心》 창간호에는 최린의 글 〈시아수양관 是我修養觀〉이 실려 있다. 이로써 1918년 가을에도 두 사람이 만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용운과 최린, 두 사람은 서로 의기투합했던 지우(知友)였다. 한용운은 옥중에서도 시를 써서 최린에게 전하기도 했었는데, 〈증고우선화 贈古友禪話〉가 그것이다. 고우(古友)는 최린의 호다. 이 시를 통해 두 사람 사이의 깊은 동지적 유대감을 읽을 수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용운과 최린의 오랜 친분은 3 1운동을 계획한 초기부터 두 사람이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천도교측에서 최초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했던 이는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 등이었다 4).
    그런데 오세창과 권동진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그리고 최린은 외부의 일을 맡았었다 5). 따라서 최린은 단순히 천도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기독교 등과 제휴하는 가장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볼 때, 3 1운동 모의 초기부터 최린과 한용운이 만나 긴밀하게 협의했던 사실은 당연히 주목되어야 옳다.

    〔2〕 천도교의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3인이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로 합 의했는데, 그 시기는 1918년 11월 하순경으로부터 12월에 이르는 때다 6). 그리고 이 세 사람이 교주 손병희의 동의를 얻고, 3 1운동의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착수한 시기는 1월 20일경 이후부터다 7). 이처럼 천도교측에서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계획하고 있던 그 무렵, 한용운이 최린을 찾아가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의했다. 곧 1월 27 28일경에 있었던 일이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큰 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던 한용운은 최린에게 "조선에서 제일 큰 단체인 천도교에서는 독립운동을 전개할 의사가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대화의 내용을 한용운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1월 27 28일경 나는 최린과 나의 집에서 회합하여 여러 가지 시국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던 중 독립할 운동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소수의 인원으로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니, 다수의 동지를 얻는 데 같이 힘쓰자고 말한 후 작별하였다. 그후 재삼 최린과 상담한 바 천도교회는 신도가 많으니 천도교를 중심으로 운동하자고 하였다. 8)

    나는 최린과는 친밀한 사이로서 평소부터 서로 왕래가 있었는데, 본년 1월 27일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인을 집으로 찾아가서 잡담 끝에 화두(話頭)를 고쳐 우리도 독립운동을 하자고 하였다. 그때 나는 동인에 대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데는 적은 수의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될 수 없으니, 큰 단체를 조직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천도교는 대단체이니, 그대 등 천도교 단체에서는 독립운동을 할 의사가 없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그런 의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내가 천도교인과 논의하여서 독립운동할 것을 기도하여 보겠다고 하였다. 그후 여러 번 만나서 의논하였는데, 최린은 천도교에서 그런 의사가 있으니 힘을 같이 하여 보자고 하였다. 9)

    나는 항상 최린과 왕복하다가 본년 1월 27 28일경 최린을 그 자택으로 찾아가서 잡담을 하던 중, 세계 정세, 즉 전쟁과 평화 회의를 말하고 민족 자결이 제창되어 세계 각국이 독립이 된다는 말을 하면서 조선도 이 기회에 독립이 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은 다수의 사람이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로, 조선에서는 천도교가 제일 큰 단체이니, 천도교의 의사는 어떠하냐고 최린에게 물으니, 최린은 천도교서도 그런 생각이 있다 하므로 나는 같이 힘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후 여러 차례 왕복하면서 이 운동을 협의하였다. 10)

    이상은 한용운이 최린을 찾아가서, 천도교측에서 독립운동을 할 의사가 있는지의 여부를 타진했던 사실에 관한 한용운의 진술이다. 3회에 걸친 거의 같은 내용의 진술을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때문 이다. 그러면 한용운에 대한 최린의 진술은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린은 한용운과의 만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용운은 일본에 유학할 때부터 알게 되었는데, 금년 1월 말경 나에게 와서 목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고 있으므로 조선에서도 독립운동을 하면 어떻겠는가고 말하였다. 그때 나는 손병희와 동문제를 상담한 후였으나 한용운은 우리들의 그러한 계획을 알지 못하고 온 모양이므로 그러한 계획의 비밀을 누설하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단지 동인에게는 수단 방법을 잘 연구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답하였는데 그 후 수차 동인이 찾아왔으므로 1월 말경 우리들의 계획을 밝힌즉 한용운은 자기도 참가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11)

    나는 그(한용운)의 의향을 알아보기 위하여 국제 정세와 국내 인심 동향을 말하는 중 그는 비분강개한 어조로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우리로서 어찌 좌시묵과할 수 있는 일이냐고 말하였다. 나는 그의 의사를 간파하고 그간 경과 사실을 피력하였더니, 그는 즉석에서 불교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12)

    이상에 인용해 본 한용운과 최린의 진술을 통해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한용운이 최린을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의한 점이다. 물론 최린은 한용운의 제의를 받고서 독립운동을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천도교의 권동진 오세창 등과 이미 비밀리에 추진해 오고 있었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한용운이 최린의 권유를 받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 아니라, 최린을 통해 천도교측을 움직여 보려 했던 그 의도 자체다. 한용운은 2월 15일경 오세창을 그 집으로 방문하여, 최린과 서로 의논한 것을 말하고, 오세창의 찬성을 얻은 바 있다 13). 이러한 사실들은 한용운의 능동적인 역할과 관련하여 시사해 주는 바 적지 않다.

    그런데 김법린(金法麟)이 전하는 한용운의 말에 의하면 1918년 11월 말경에 최린과 회담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천도교의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독립운동을 계획했다는 최초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앞에 인용한 한용운과 최린의 진술에 의하면 한용운이 최린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상의한 때는 1919년 1월 말경이고, 천도교측에서는 이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1918년 11월 말경에 한용운이 최린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상의했다는 기록도 마땅히 주목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을 보다 확실하게 뒷받침해줄 구체적 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다음의 몇 가지 사실에 유의할 때, 한용운이 1918년 11월경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것은 믿어도 좋을 것 같다. 한용운은 특별한 이유없이 《유심》의 간행을 1918년 제3호로 중단한다. 그리고는 이 무렵부터 중앙학림의 학생들이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2월 28일 한용운은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의 준비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간 나의 동정에 대하여 퍽 궁금하였을 것이다", "여러 달을 두고 궁금히 여기던 제군들에게 쾌소식을 전하겠다", "나는 수월(數月) 이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는 등의 말을 했었다. '여러 달', '수월' 등의 표현으로 볼 때 그의 활동은 1918년 11월 말경부터 시작된 것이 거 의 확실하다. 이 점에 유의하면, 한용운이 최린을 만나 회담한 시기가 11월 말경이었다는 말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

    물론 한용운이 최린을 만난 시기가 11월 말경이 아니라, 1월 27일경이 사실이라 해도 한용운은 3 1운동 모의 초기부터 참여한 셈이 된다. 천도교측에서 11월 하순에 논의가 있었더라도 본격적인 활동은 1월 하순경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왜 천도교의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2월 28일 밤 김법린 등 중앙학림의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왜적의 혹독한 강압 정책으로 말미암아 국내에서는 정치 단체는 가히 절종(絶踵)이 되다시피 되었으므로 이 독립운동의 모체로는 종교 단체밖에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첫째 동학의 혁명적 전통으로 보든지 그 구성인들의 사상적 경향으로 보아 천도교의 영수와 운동 전개의 방침을 협의키로 했다. 14)

    일차적으로 천도교측과의 제휴에 성공한 한용운은 최린과 오세창 등에게 여러 종교 단체와의 연합에 대해 제의했었다.

    내가 崔와 吳를 다시 만났을 때 양인에게 말하기를 천도교인만 말고 야소교회와 불교신도를 차차 동지로 하고 그 사람의 명단을 국민의 대표로 하여 공공연한 독립운동을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서로 비밀을 지키는 열렬한 인물을 동시에 가입시키려 하였다. 15)

    한용운의 이 제의는 결과적으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3 1 독립운동을 협의하던 초기 단계에 있어서의 한용운의 역할은 최린과 함께 선도적이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3〕 한용운은 유교측과의 교섭에 직접 나서는 등 동지 규합을 위해 노력한 바 있다. 유교측과의 교섭에 대해서는 한용운의 증언에서만 언급되고 있는데, 다음의 기록은 김법린이 전한 한용운의 말이다.

    유교측과의 교섭인데 유교측의 대표로 전간재(田艮齋) 선생으로 할까 곽면우(郭勉宇) 선생으로 할까가 문제였으나, 나는 곽선생을 가(可)타 하였다. 선생은 대관(大官)의 경력을 가졌으니, 우리들 가운데 한 이채적 존재로 여겼던 까닭이다. 곽선생을 거창 향거(鄕居)에 방문하니, 선생은 비록 고령이시면서 쾌락은 하셨으나 가사에 관한 것을 장자와 협조한 후 최후적 결정을 다음 날 아침에 회답하겠다 하므로 정각까지 가다렸으나 소식이 없으므로 귀경하였는데, 그후 곽선생으로부터 승낙의 회보가 있었으나 인쇄물이 완료되었으므로 서명되지 않았다. 유감이었다. 16)

    한용운이 면우 곽종석을 방문하고 3 1운동에 유교의 대표로 참가해 줄 것을 교섭했다는 이 기록 자체를 믿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다. 면우 문하의 고족(高足)인 중제(重齊), 김농(金膿)은 "한용운의 내방은 기억나지 않을 뿐더러, 면우의 승려와의 접촉은 상상키 어렵다"고 했었다. 허선도(許善道)는 중제의 이 말을 근거로 해서, 곽종석이 한용운을 만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17). '면우의 승려와의 접촉은 상상키 어렵다'는 중제의 증언은 신빙성이 극히 적다. 18)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용운의 진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한용운 공소공판기〉 중에는,

    유교의 동지를 모을 필요가 있을 줄 알고, 경상도 거창군 곽종석의 집에 갔다가 24일에 상경하였는데, 갈 적에 정탐이 뒤를 따르기 때문에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올라왔다. 19)

    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 자신의 이 증언과 김법린이 전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한용운이 곽종석을 만났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한용운은 스스로 "정탐이 뒤를 따라 목적을 달하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지만, 이 말을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곽종석을 연루시키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한 말일 것이기 20) 때문이다. 한용운이 곽종석을 만난 날은 2월 23일이고, 24일에 상경했다. 27일 밤에는 선언서의 인쇄가 완료되었다. 이 사실에 유의할 때, "곽선생으로부터 승낙의 회보가 있었으나 인쇄물이 완료되었으므로 서명되지 않았다"는 말에도 별 문제는 없다. 물론 유교측과의 교섭을 시작한 시기가 너무 늦었고, 급박했다는 문제는 없지 않다. 유교와의 연합 시도는 한용운 혼자서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논이 진행되고 있을 때, 한용운의 견해가 반영되고 있었음과 또 직접 교섭을 위해 거창까지 다녀왔던 점 등으로 볼 때 동지 규합에 있어서의 한용운의 활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용운은 구한국 고관인 윤용구(尹用求) 박영효(朴泳孝) 한규설(韓圭卨) 민영휘(閔永徽) 등에 대한 포섭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김관호(金觀鎬)는 만해로부터 직접 들었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선생이 직접 윤용구를 방거(訪去)하였으나 면접을 못하고, 박영효 씨는 쾌락하고도 다시 소식 없고, 한규설 씨는 "일이 거창한걸"을 삼호(三呼)하며 걱정하는 태도뿐이더라고 하며, 또 민영휘 씨를 방거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성력 후원하겠다며 장자 민형식(閔衡植)을 호입(呼入)하여 대면케 하였는데, 3 1운동 자금 90원을 내었고, 선생과 평생 막역하게 지냈다. 21)

    그로부터 한용운은 이상재(李商在)를 만나 독립 선언에 대한 동의를 구했지만, 독립 청원을 고집하던 그로부터 끝내 거절당했었다. 이 사실을 만해로부터 들었던 최범술(崔凡述) 22)과 김관호 23)는 같은 내용의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손병희 또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는 단계에 이르러 그 태도를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용운이 그를 만나 담판한 결과 승낙을 받았다는 사실 24)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용운은 동지들의 규합에 적극적이고도 선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4〕 3 1운동이라는 용광로에의 점화는 3월 1일 명월관에서의 독립 선포식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 선포를 위한 원래의 계획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독립을 선포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계획에 의해 2월 26일 최린은 한용운에게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의뢰했었고, 또 한용운은 이 제의를 수락했었다. 이 사실을 한용운은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26일 최린은 독립 선언서는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 낭독 발표하기로 하였으니, 나를 보고 그 곳에서 읽으라고 의뢰함으로 나는 승낙하였다. 25)

    최초 최린은 나에게 대하여, 동지끼리만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자 할 때 자기가 선언서를 낭독하려고 하였으나, 요새 병기가 있으니 그대가 낭독하여 달라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26)

    이처럼 한용운이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 발표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28일 밤의 최종 회합에서 변경되었다. 즉 독립을 선포할 장소를 명월관 지점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폭동이 있기가 쉬우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27)

    3월 1일 2시 명월관 지점에서 행해진 독립 선포식은 간단했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29명이 참석한 명월관 지점에서의 그 식을 한용운이 주재했다. 물론 최린의 청에 의한 것이었다.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던 원래의 계획을 변경해서 한용운의 식사(式辭)로 대신했다. 오후 2시 한용운이 일어나 식사를 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 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협심하여 조선 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

    는 내용으로, 독립 선언의 기쁨과 계속된 운동을 권하는 취지의 짤막한 인사였다 29). 인사를 끝낸 한용운은 곧 축하하는 의미의 축배를 들 것과 만세 삼창을 하자고 제의했고, 그의 선창에 따라 일동이 만세를 삼창했다.
    그리고는 일제 경찰에 의해 29명 전원은 체포 연행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3월 1일의 독립 선포식이 한용운의 주재에 의해 진행되었던 사실 30)은 3 1운동에서의 한용운의 위치가 어떠했던가에 관해 시사해 주는 바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