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불교계의 동지 규합(糾合)

    1〕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측 대표는 겨우 2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운동의 모의 초기부터 한용운이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점에 유의하거나, 혹은 천도교측 15명, 기독교측 16명에 비교해 볼 때, 불교측의 2명은 분명 적은 숫자다 62). 한용운은 최린과 오세창에게 "천도교인만 말고 야소교회와 불교 신도를 동지로 하고, 그 명단을 국민의 대표로 하여 공공연한 독립운동을 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63).
    또한 그는 불교측과의 협의,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천도교측의 최린에게 승낙한 바도 있다. 이에 대해서 최린은,
    그는 즉석에서 불교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그 후 한용운은 불교측 동지를 규합하기에 노력하였으나 시기가 급박하고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널리 통지하지 못한 관계로 한용운 백용성 2인만 참가하였으나 불교측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다. 64)

    한용운은 최린으로부터 야소교와 합동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불교 동지를 모으려 했었다 65).
    백초월(白初月), 송만공(宋滿空)과는 밀약한 바 있었고 66), 박한영(朴漢永),진진응(陳鎭應), 도진호(都鎭鎬), 오성월(吳惺月) 등에게 회담을 교섭하기도 했으나, 교통 기타의 사정으로 면담치 못했다 67). 2월 하순에는 범어사(梵魚寺)까지 다녀오기도 하였다 68). 그러나 결과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백용성만이 한용운과 함께 불교측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3 1운동에 참여한 불교측의 대표가 극히 적었던 이유로써 시기의 급박, 일경의 감시, 교통의 불편 등을 내세우지만, 이로써 여러 의문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의 대표로 참가한 백용성 (속명 相奎 ; 1865∼1940)은 한용운보다 14세 연상이었다. 원래 해인사 승려였던 그는 서울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고 10여년 간 대중 교화에 힘쓰고 있었는데, 한용운과는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1918년 8월에 한용운이 간행한 《유심》지에 백용성의 〈파소론 破笑論〉이 실린 것도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2월 27일 저녁 한용운은 백용성의 집을 방문하여 독립운동에 불교계의 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하자 그는 즉석에서 쾌히 승낙하였다. '어느 때든지 통지만 하면 어느 곳에든지 가기로 약정했고' 69) 인장을 한용운에게 맡겼다 70). 한용운은 백용성으로부터 너무 간단하게 동의를 얻었기에 한 번 더 오라고 했다 71)고 한다. 이만큼 백용성의 동의는 분명하고 명쾌했던 것이다.

    〔2〕 한용운은 1918년 가을부터 중앙학림의 학생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72). 학생들이 그의 자택에 자주 출입했던 것이다. 승려 교육을 위해 설립된 중앙학림의 학생들은 각 본말사(本末寺)에서 파견한 승려들이었다. 한용운이 이들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의 배포를 의뢰할 정도로 이들 사이에는 깊은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28일 오후 3시 한용운은 이종일(李鍾一)로부터 선언서 3천매를 인수하여 귀가했다. 그리고 그는 중앙학림의 학생 김규현(金圭鉉)에게 오늘 밤 학생 몇 명을 동반해 집으로 오라고 일렀다. 손병희 집에서의 회동을 마친 한용운은 밤 12시경 귀가했는데, 중앙학림의 학생 정병헌(鄭秉憲) 김상헌(金尙憲) 오택언(吳澤彦) 김규현(金圭鉉) 전규현(田奎鉉) 신상완(申尙玩) 오한현(吳漢鉉) 김법린(金法麟) 김동신(金東信)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용운은 이들에게 말했다.

    여러 달을 두고 궁금히 여기던 제군들에게 쾌소식을 전하겠다. 유구한 역사 찬란한 문화를 가진 우리 민족이 자주 독립을 중외에 선언함은 당연한 일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결연히 나선 우리는 아무*애( *碍)도 없고 포외(怖畏)도 없다. 군 등은 우리 뜻을 동포 제위에게 널리 알려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 특히 군 등은 서산(西山) 사명(四溟)의 법손(法孫)임을 굳이 기억하여 불교 청년(佛敎靑年)의 역량을 잘 발휘하라. 73)

    그리고 한용운은 3천매의 선언서를 3월 1일 밤에 시중에 돌리도록 당부했다.
    한용운의 자택을 물러나온 이들 청년 승려들은 인사동의 범어사 포교당에 모여 운동의 전개 방략을 토의했다.
    이들은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 집합, 시위 행진에 참여하고, 3월 2일 새벽에는 서울의 동북부 일대에 선언서를 배포했다. 이들은 곧 지방 사찰로 내려가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범어사로, 김동신은 해인사로, 오택언은 통도사로, 김대용(金大容)은 동화사로, 정병헌은 전라도 방면 등으로 파견되어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4월에는 신상완, 백성욱(白性郁), 김법린, 김대용 등이 상해로 밀행해 임시 정부의 요인들과 만나기도 했다. 한용운의 지도를 받기도 했던 중앙학림의 청년 학승들은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외에도 전국에 산재한 대소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던 시위운동은 그 수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