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한용운과 공약삼장

    〔1〕 3 1운동에 있어서 독립 선언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3 1운동을 주도했던 최린도 이 점을 인식하고, '제일 필요한 운동의 골자는 선언문'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한용운은 선언서 작성의 일에 관계했고, 또 최남선이 기초한 선언서 끝에 공약삼장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 사실은 3 1운동에 있어서의 한용운의 역할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한용운은 선언서 작성의 문제에 대해서, "선언서의 작성에 관한 것인데, 기초 위원으로, 최린 최남선 및 나 3인이었는데, 최남선 씨는 선언서에 서명치 않고 초안만을 집필하고 나는 그것을 수정키로 하고, 최린 씨를 그 기초 책임자로 정하였다" 31)고 술회한 바 있다. 이 기록과 관련하여, 최린이 최남선에게 독립 선언서의 기초를 맡기면서 한용운을 기초 위원으로 넣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32). 그러나 선언서 작성의 책임을 맡고 있던 최린이 한용운과 더불어 선언서 작성에 대해 의논했던 것은 사실이다. 최남선이 최린의 권고를 받고서 선언서를 쓰기로 약속한 시기는 2월 초순이다. 그는 선언서를 쓰되 독립운동의 표면에 나서지 않고, 책임은 최린이 질 것을 조건으로 선언서 기초에 착수했다. 최남선의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해서 한용운은 강한 불만을 나타내고 자기가 선언서를 작성하겠다는 의사를 최린에게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최린은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질 수 없는 최남선으로서 선언문을 짓는 것은 불가한 일이니 선언문은 자기가 짓겠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책임은 누가 지든지간에 선언문만은 육당이 짓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용운의 이의를 완곡히 거절하였다. 33)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질 수 없는 최남선이 선언문을 짓는 것은 불가하다'는 한용운의 지적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의 제안을 거절했던 최린의 판단에는 문제가 있었다. 아무튼 선언문 작성에 대해서 최린과 한용운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이 기록이 알려주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4). 선언서의 대체적인 취지는 최린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 4인이 협의하여 정했지만 책임은 최린이 지고 있었다 35). 최린은 손병희 등 3인을 제외한 천도교측의 다른 대표나 혹은 기독교측의 어느 누구와도 선언서의 취지를 협의한 일은 없었다 36). 그런데 최린은 한용운에게 선언서 작성에 대해서 의논했고, 선언서의 취지 및 청원서의 취지와 발송 방법을 말했었다 37). 그리고 한용운은 24일에 최남선이 기초한 선언서를 보았고 38), 자기의 견해와 다른 부분을 수정하기도 했었다 39). 또한 2월 26일 최린의 집에서 선언서를 정서해서 가지고 있기도 했었다. 40)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용운은 최린과 함께 선언서 작성의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3 1운동에 있어서 독립 선언서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선언서 작성에까지도 관계했던 한용운의 위치는 주도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용운이 선언서 초고의 어떤 부분을 수정했는지 알 수 없지만, 끝 부분에 다음의 공약삼장을 덧붙인 것만은 확실하다.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발휘할 것이요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정당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여금 어대까지든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장문의 선언서가 눈이라면 짤막한 이 공약삼장은 눈동자다. 눈동자가 있어 눈을 눈답게 하듯, 공약삼장이 있어서 독립 선언서의 선언서다운 구실을 하게 했다. 선언서 본문이 지나칠 정도로 온건한 문체로 표현되었음에 비해, 공약삼장의 표현은 단호하고 힘차다 41). 대중에게는 장문의 선언서보다 간략한 공약삼장이 더욱 많은 영향을 주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우렁찬 구절이 포함된 이 공약삼장이 국내외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은 많았다. 이에 관한 몇 가지 사례를 보자 42). 간도 거류 조선 민족 일동이 1919년 3월 13일에 선포했던 독립 선언 포고문(獨立宣言布告文)에는 그 말미에 이 공약삼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 실었다. 하동(河東)의 박치화(朴致和) 등 12인이 하동 장날인 3월 18일에 선포했던 대한 독립 선언서에는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暴動과 亂擧는 行치 말고 人道와 正義로 獨立門으로 前進합시다'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대한 민족 대표 박은식(朴殷植) 등 30명의 이름으로 10월 31일 중국에서 선포된 선언서에도 '3월 1일의 공약의 제3조를 준하야 최후의 일인까지 戰함을 불사할지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919년 11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등 대한 민족 대표 33인이 발표한 선언서에도 '만일 일본으로 하여금 끝내 이를 悔改함이 없다면 吾族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써 血戰함을 사양하지 않을 것임을 玆에 聲明한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상의 여러 사례를 볼 때, 공약삼장이 국내외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에 의해서도 이 공약삼장은 크게 주목되었다. 민족 대표들에 의한 일제의 조사 과정에서도 공약삼장의 의미가 추궁되었다. 그 중에서도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했던 제2항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일제는 "이 구절이 폭동을 선전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가"고 거의 모든 민족 대표들에게 추궁했었다. 물론 민족 대표들을 내란죄로 얽어매기 위한 의도를 가진 질문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의 표명에 놀란 때문이기도 했다. 민족의 강한 독립의지를 담아 간략히 표현한 공약삼장의 덧붙임은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3〕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 선언서 끝에 공약삼장을 한용운이 덧붙였다는 사실은 집요하고도 치밀한 취조와 수사를 했던 일본 관헌들이 밝혀내지 못했었다. 훗날 한용운이 그를 따르던 동지들에게 직접 밝힘으로써 세상에 두루 알려지게 되었는데 43),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공약삼장은 한용운이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고 서술한 등이 그 예다 44). 그런데 공약삼장을 최남선이 기초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조용만(趙容萬) 45), 신용하(愼鏞廈) 46) 등의 견해가 그것이다. 필자는 신용하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공약삼장은 한용운이 첨가했음을 여러 측면으로 밝혀본 바 있다 47). 그런데 최근 홍일식(洪一植)에 의해 공약삼장을 최남선이 기초했다는 주장이 한번 더 되풀이되었다. 48)
    홍일식은 먼저 한용운이 공약삼장을 첨가했다는 설을 부정한다. 그는 한용운이 공약삼장을 첨가했다는 설의 확실한 근거는 한용운 자신의 언명에서나 다른 이들의 증언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용운은 법정에서 "서류를 보고 독립에 찬성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것을 보고 찬성한 것이 아니라 다소 나의 의견과 다른 점이 있어서 내가 개정한 일까지 있다"고 답한 바 있다 49). 고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개정한 일이 있었음은 확실하고, 그것이 공약삼장의 첨가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립운동은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선언서 중의 '착수가 곧 성공이라'는 표현에 담았다는 최남선의 술회 50)와 공약삼장 중의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표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홍일식은 한용운의 서류 개정 운운의 언명은 기억의 혼란에서 비롯된 착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억측이다. 일시 등 사소한 일은 기억에 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선언서 등의 서류를 개정한 사실 등이 기억의 혼란이 있기는 어렵고, 더구나 자기에게 크게 불리할 수도 있는 진술을 기억의 혼란에 의해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한용운이, 참고할 책이라고는 없는 옥중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장편의 글을 썼던 사실에 유의할 때 '기억의 쇠퇴와 혼란' 운운은 설득력이 없다.
    독립 선언서는 인쇄에 붙이기 전인 24 25일경 한용운 오세창 권동진 양한묵(梁漢默) 손병희 등에게 두루 읽혔다. 한용운은 24일 최린의 집에서 선언서를 보았다 51). 그리고 26일에는 최린의 집에서 선언서 1부를 정서해서 보관하기도 했었다 52). 따라서 '한용운이 선언서를 보지 못했다' 53)거나, '독립 선언서를 수정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54)는 등의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 홍일식은, "한용운이 독립 선언서를 고쳐 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2월 24일 최린을 만나고부터 이승훈을 만나기까지 최린의 집에서이다. 그렇다면 한용운은 최린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공약삼장을 썼으며, 최린은 선언문의 기안자인 최남선의 의견이나 핵심적인 동지인 오세창 권동진 등의 견해도 들어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공약삼장의 첨가를 수락 결정했다는 말이 된다" 55)고 하면서,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공약삼장은 긴 문장이 아니다. 한용운은 능히 최린과 마주앉은 자리에서도 이를 덧붙일 수 있는 식견과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식견과 능력은 그가 옥중에서 쓴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로 입증된다. 한용운은 최린과 함께 선언서 기초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선언서 작성의 일은 최린 한용운 최남선 등 3인에게 위임된 일이기에 오세창 권동진 등과 일일이 의논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최남선은 최린의 의견에 따라 선언서를 기초했었다. 따라서 한용운은 공약삼장을 첨가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홍일식은 "한용운의 언명 외에 공약삼장은 한용운이 썼다고 하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논거로는 김법린의 회고담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김법린의 글에서 한용운이 선언서 작성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관여한 것처럼 기초 위원 운운의 말을 한 것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김법린의 회고담이 한용운이 공약삼장을 첨가했다는 설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주장은 신용하의 견해를 답습한 것이다.
    한용운이 공약삼장을 첨가했다는 것은 한용운이 그의 제자들에게 밝힌 사실이다. 이 사실을 들어서 전한 이로 김법린 이외에도 최범술 김관호 등이 있다 56). 더구나 김관호는 지금도 생존한 분이고, 강연회 등을 통해 이 사실을 강조해 오고 있다. 그리고 33인 중의 한 분이었던 이갑성(李甲成)도 이 사실을 증언한 바 있다. 생존한 증인의 증언은 무시한 채 김법린의 표현 정도를 문제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용운이 제자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고도 생각하기 어렵고, 그 제자들이 터무니없는 설을 날조해 유포했다고 보기도 어렵지 않은가?
    홍일식은 최남선이 공약삼장까지 썼을 가능성에 대하여, 3 1 독립 선언서와 2 8 동경유학생 선언문의 구조적인 유사성 및 최남선 자신의 언명을 그 논증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홍일식은 2 8 동경 유학생 선언문과 3 1 독립 선언서의 구조적인 유사성을 지적하고, 이는 최남선이 2 8 선언문의 구조를 참고해서 3 1 독립 선언서를 작성한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것은 최남선이 공약삼장까지 썼다는 한 논증이 된다고 주장한다 57).
    홍일식은 3 1 독립 선언서의 구성이 2 8 선언문과 동일하다고 한다. 그러나 두 선언문 사이에는 상이한 점이 적지 않다. 그 제목이 하나는 선언문인데, 다른 하나는 선언서로 되어 있음이 다르다. 2 8 선언문의 순서는 선언문 본문 - 일시 - 서명자 - 결의문의 4항으로 되어 있음에 비해, 3 1 선언서의 경우, 본문 - 공약삼장 - 일시 - 서명의 순서로 서술했다. 2 8 선언문에는 결의문(決議文) 4항으로 되어 있음에 비해 3 1 선언서는 공약삼장으로 표현했음이 다르다. 또 2 8 선언문에는 일시를 서기(西紀)로 표기했는데, 3 1 선언서는 조선 건국 사천이백오십이년으로 썼다. 이처럼 2 8 선언문과 3 1 선언서는 형식이나 표현 등에서 다른 점이 적지 않다. 따라서 2 8 선언문이 3 1 선언서의 작성에 중요한 참고가 되었을 것이고, 이 점은 최남선이 공약삼장까지를 썼다는 하나의 논증이 된다는 홍일식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하겠다.
    홍일식은 최남선의 다음과 같은 언명을 최남선이 공약삼장까지 썼을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중요한 논거로 제시했다.

    선언서 이하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의견서,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 메시지 등의 형식과 내용과 표현 전부가 내 의사로서 작성해서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58)

    최남선의 이 글은 3 1운동으로부터 27년이 지난 1956년에 씌어진 것이었다. 홍일식은 "형식과 내용과 표현 전부가 내 의사로서 작성해서 그대로 사용된 것이었다"는 최남선의 주장을 방점까지 표시해서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은 신빙할 만한 자료가 못된다. 독립 선언서를 비롯한 여러 서면은 모두 최린과 상의해서 최남선이 기안만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최린과 최남선의 증언이 일치하고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최린은 "선언서의 골자를 내가 말했다" 59)고 했었고, 최남선은 "독립 선언서는 최린이 말하는 취지와 나의 생각을 서로 논의해서 기초한 것" 60)이라고 했었다. 최남선의 이 진술에 유의할 때, 선언서의 형식과 내용과 표현 전부가 자신의 의사로 작성했다는 훗날의 주장을 신빙하기란 어렵다.
    홍일식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표현은 최남선이 당시 그의 계몽적인 글 가운데서 즐겨 쓰던 용어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최남선은 선언서 중의 '良心이 我와 同存하며 眞理가 我와 幷進하는도다. 着手가 곧 成功이라 다만 前頭의 光明으로 進할 따름인저'라는 끝 부분의 표현 속에 독립운동이 그 목적을 완수하기까지 지속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담고자 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61).. 만약 공약삼장 중의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표현을 자기가 쓴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 말 대신에 '착수가 곧 성공'이라는 어정쩡한 속담으로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의지를 표현하려 했다고 술회할 수 있었겠는가? 최남선이 공약삼장을 짓지 않았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