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Ⅳ. 한용운 민족정신의 실천과 전개

    3.1독립운동 이후의 만해 한용운의 사회활동 중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몇가지의 활동 내역을 중점 살펴서 민족정신의 실천과 전개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신간회 활동에 나타난 민족정신의 원형은 어떠한 것이며, 둘째 물산장려운동을 통한 민족자본 형성의 문제를 통하여 경제자립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셋째 애국계몽운동을 통하여 민족적 자아의 틀을 확립하고자 노력한 일면을 살펴서 나라사랑의 정신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가장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민족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했던 만해 한용운의 특립독행하는 민족정신의 구현이었고, 우리 한민족의 자랑인 동시에 우리 계례의 톡특한 민족정신의 원형으로 발전되어진 발자취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구의 내용을 통하여 민족적인 자아와 한민족의 독특한 민족정신의 유형을 살필수 있는 계기를 갖고자 한다.

    사회운동과 민족운동 -차이점과 일치점
    오늘의 조선이란 전제 아래에서는 두 길이 다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실행 또는 수단 방면에 있어서 두 운동이 똑같은 경로를 밟아 최종의 목적에 향할 것인 줄 압니다. 그러면 어떠한 점에 있어서 부합되느냐.
    그것은 극히 간단하니, 조선에서는 민족 운동의 장애나 사회 운동의 장애나 다 같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장애를 물리치기 위하여 하는 운동이 비록 본질상으로 다르다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는 같이 마쳐질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사회 운동파가 정치 해방을 제외로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상이고 실제에는 그리 되지 않을 것이외다. 저 러시아로 볼지라도 그네들은 국가를 가지고 한 민족의 독립을 가진 뒤에 사회 혁명을 이룬 것입니다.
    또 그 사회 혁명도 지금까지 러시아라는 국가 안에 있는 것이외다. 나라도 없고 민족의 독재권조차 없는 우리조선에서 어떻게 완전한 사회 혁명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로는 민족 운동이 앞장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연석하여 실제 문제상으로 볼 때에 사회파가 해방의 수단으로 하는 지금 농촌 문제 즉 소작 쟁의는 그것이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서로 이해를 다투는 것이니 손해를 본다 하여도 같은 조선 사람이 볼 것이니, 이것이 벌써 민족파가 본 신조하고 다르지 않느냐 하지마는 그것은 그렇지 않으니, 대다수의 조선 사람이 이익이 된다면 소수는 희생시키는 것이 마땅하고, 또 인도상 견지로 보아 잘못이면 어디까지든지 응질할 터이니 이 점에 있어서 정신이 같지 않습니까.

    1.물산장려운동을 통한 민족정신

    1920년대초부터 1930년대말까지 한민족이 거족적으로 전개한 경제자립운동으로 물산장려운동을 통한 민족정신의 원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3.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은 과거와 같은 무력투쟁이 아니라 문화운동으로 그 형태가 전환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은 이 같은 문화운동의 한 갈래로서 1922년에는 마침내 범국민운동으로 번졌으며 이듬해에는 조선물산장려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회의 목적은 일제의 경제적 침략을 물리치고 우리의 생활을 국산품으로 충당하여 자활의 길을 걷자는 것이었다. 물산장려회에서는 사회 각층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강연회를 열고 계몽운동을 벌였으며 기관지를 발간하여 전국민에게 경제적 독립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주었다. 그때 당시 조선물산장려회가 발행한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의 물산장려회 전단의 내용 중에서 내 살림은 내 것으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거의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제일 세상에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은 오늘에야 우리가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 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여 살고서 볼 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쓰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이와 같은 운동은 국권상실 후 일제의 경제침략은 더욱 거세어 일본침략자본에 의하여 우리 민족의 생활권은 잠식되어가는 역사 현실에 대하여 민족적 자각과 민족정신의 승화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각을 촉구하여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근대기업을 일으켜 자주.자립 경제를 수립,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경제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경제 자립을 위한 민족적 자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직후부터이며, 1920년대초부터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다. 1920년 봄 민족지도자들은 민족기업의 건설과 육성을 촉구하는 조직체 결성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이해 8월 조선물산장려회를 발족하였다. 창립총회에는 교육자.종교인.실업인 및 지역유지와 혁신 청년들이 참석하였다. 평양 조선물산장려회는 장문의 취지서를 발표하고 당면 실천과제로서 경제계의 진흥, 사회의 발전, 실업자의 구제책, 국산품애용, 근검풍토, 실천성의 양성을 내세웠다. 평양에서 결성된 물산장려회는 몇 차례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와같이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를 위한 조직체가 결성되자, 서울의 조선청년연합회에서도 이 운동에 호응하여 1922년말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일간지를 통하여 전국의 민중으로부터 조선물산 장려 표어를 모집하였으며, 국산품애용을 장려하는 지방순회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청년회의 활동으로 물산장려운동의 기풍은 점차 민중 속에 확산되었다. 1923년 1월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 강당에서 조선물산장려회의 전국적 조직체가 탄생되었다. 창립총회에서 이사 20명을 선출하였는데, 독립운동가.교육자.종교인.기업인 등 각계각층의 민족지도자가 망라되었다. 이 회의에서 회의조직과 활동방향을 정하였다. 활동지침으로, 첫째 조선인의 산업적 지능을 계발, 단련하여 실업에 입각하게 하는 산업장려, 둘째 조선인의 상품을 애용, 무육하여 조선인의 산업을 융성하게 하는 애용장려, 셋째 조선인의 생활 및 기타에 관하여 경제적으로 건설 또는 개선할 바 일반사항을 조사, 강구하여 그 실현을 지도, 관철하는 경제적 지도 등의 목표를 정하였다. 또 제1기 실행조건을 공포하여 대중계몽운동에 나섰다. 제1기 실행조건으로 우선 의복은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음력 계해 정월 1일부터 조선인 상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하여 착용할 것, 음식물에 대해서는 식염.설탕.과일.청량음료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조선물산을 사용할 것, 일용품은 조선인 제품으로 대용가능한 것은 이를 사용할 것으로 정하였다.
    구정을 기하여 거행하기로 한 가두행렬은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중단되고 말았으며, 전국을 순회하는 계몽강연도 일제의 방해로 지방에 따라서 강연도중 연사의 발언이 중지되거나 붙잡히기도 하였으나 초기에는 대체로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이와같이 서울에 전국적 조직체가 결성된 뒤 강연회.전단살표 등에 의한 선전.계몽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각 지방에서도 지방분회를 결성하였다. 평양.대구.부산.광주.함흥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방 소읍까지도 지방분회를 설립하였는데, 그 호응도는 오히려 더 열렬하였다. 중앙본부에 해당하는 서울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이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소비조합 및 생산기관의 설치, 조선물산진열관의 설치와 조선물산품평회 개최, 계몽을 위한 기관지 발행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이 시기부터 탄압을 가중, 자금원을 봉쇄하여 이 사업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회지 발행도 자금난으로 준비를 미루어오다가 회지만은 조속한 시일내에 발행해야 한다는 여론에 힘입어 같은해 11월에 <산업계> 를 창간하였다. <산업계> 는 제5호까지 발행되고 그뒤부터는 <자치> 로 개칭되어 12호까지 발행되었고, 1929년 10월에는 다시 <조선물산장려회보> . <장산> . <실생활> 등으로 개칭되면서 1932년까지 간행되었다. 특히 본회의 회지인 실생활에 제3권 11호에 고난의 칼날에 서라는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세상 사람이 쉽고 성공할 일이면 하려 하고 어렵고 성공할 가망이 적은 일이면 피하려는 경향이 있으니, 그것은 불가한 일이다. 어떠한 일을 볼 때에 쉽고 어려운 것이나 성공하고 실패할 것을 먼저 본다느니보다, 그 일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볼 것이다. 아무리 성공할 일이라도 그 일이 근본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라 하면 일시 성공을 하였을지라도 그것은 결국 파탄이 생기고 마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 돌아 보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옳은 일이라하면 용감하게 그 일을 하여라. 그 길이 가시밭이라도 참고 가거라. 그 일이 칼날에 올라서는 일이라도 피하지 말아라. 가시밭을 걷고 칼날 위에 서는 데서 정의를 위하여 자기가 싸운다는 통쾌한 느낌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다난한 조선에 있어서 정의의 칼날을 받고 서거라하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일이든지 성공이나 실패보다 옳고 그른 것을 먼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한용운의 역할은 남다른 바가 컸다. 회지간행을 1930년초에 중단한 것은 일제가 만주침략을 감행한 뒤 한국의 민족운동탄압을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 운동을 일종의 일화 배척운동이며, 항일민족독립운동이라고 보고 탄압한 것이다. 그 뒤 조선물산장려회는 특별한 활동이 없이 그 명맥만 이어졌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민족 역량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동시에 민족기업의 활동을 대변해주고 민족기업의 설립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물산 장려로 볼지라도 그것을 자본주의의 옹호라고 하지마는 우리 조선 사람으로 그리 큰 자본벌이 얼마나 있습니까. 설사 그네의 사복이 된다 하여도 외국서 물산을 공급하는 더 큰 자본벌에게 잉여가치를 제공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모든 것을 좀더 크게 철저케 생각한다면 실행 방면에 있어서는 어떤 문제이든지 꼭 일치하여지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국산품 장려운동도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우선 이운동을 더욱 확대시킬 자금이 부족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세력이 이 운동의 무의미함을 들고 나옴으로써 민족운동에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운동의 발전을 저해한 것은 일제의 탄압이었다. 그들은 이 운동을 독립운동의 한 방법이라 단정하고 직접, 간접으로 탄압을 가한 것이다.
    이리하여 전국적인 호응을 얻어 출발했던 물산장려운동은 몇해를 넘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이 운동이 집단적, 조직적으로 계승되지는 못했어도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전기간을 통해 민족의 가슴에 경제자립에 대한 강한 인식을 심어주면서 만해 한용운과 같은 선각자들이 보여준 민족정신의 실천 운동은 계례의 가슴을 훈훈히 녹여내는 청량제였다.

    2.애국 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운동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이 시기에 대두한 또하나의 거족적 민족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태반은 농촌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무지와 가난의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농촌을 부흥시키고 몽매한 민중을 계몽하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가장 급선무였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을 비롯한 많은 민족지도자들은 애국계몽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활로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여 나갔다. 이 운동은 1920년대로부터 약 10년간에 걸쳐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그 운동의 배경이 된 것은 사회사조의 흐름과 농촌부흥의 필요성을 절감한 민족지도자들의 각성에 있었다. 애국계몽운동은 먼저 YMCA, YWCA 같은 기독교 청년단체에 의해 창도되었으며 이어 천도교측에서도 조선농민을 발행하여 농촌의 문맹퇴치, 자질향상에 노력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조선일보·동아일보등 민족지들은 러시아에서 제창되었던 브나로드 운동을 본뜬 "농촌으로 돌아가자"는 표어 아래 애국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청년 학생층의 열렬한 호응을 얻어 방학 때가 되면 농촌으로 가는 청년들의 대열이 길을 메울 정도였다. 이와 함께 심 훈등의 농촌소설은 당시의 독서계를 석권하여 농촌운동의 부흥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만해 한용운도 농민운동에 관한 많은 논설을 남겼다.
    그러나 일제는 이 같은 애국계몽운동의 발전으로 한국인의 수준이 향상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로서는 한국인을 무지와 빈곤 속에 방치하는 것이 식민지 통치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강연회나 강습회를 음성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고 지도자들을 감시했으며 학생들의 단체적 행동을 강력히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10년동안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가던 애국계몽운동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 움직임이 쇠퇴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용운은 소작 농민의 애국운동에 대하여 신년 소감중 소작쟁의에 대하여와 협동조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범박하게 애국 운동이라 하면 심히 모호하다. 토지를 가진 지주가 일부분을 머슴을 두고 농사짓는 것도 농민이요, 또 토지 전부를 자기가 농사짓는 자작농도 농민이요, 남의 토지를 얻어서 농사짓는 소작인도 농민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총규합하여 어떤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감히 있다면 이러한 각층 농민을 규합하여 정치 운동 같은 것을 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 질이 다른 정치 운동이요, 농민 운동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순수한 소작 농민을 중심으로 한 애국 운동에 대하여 잠깐 말하고자 한다.

    1)소작 쟁의에 대하여
    이 소작 쟁의는 연래에 남조선 지방에 여러 번 있었으나 대부분 실패에 돌아갔다. 이 실패한 원인에 대해서는 관권의 압박이 있어 그리 되었느니 어쩌느니 하지마는 실상은 소작인의 단결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갑과 을이 다 같은 한 지주의 땅을 부치는 데 소작 쟁의가 일어났을 때에 갑의 주장을 반역하고 을이 지주에게 붙어서 저의 사리를 도모하였다면 일시로는 이익이 있었다 할지라도 긴 장래에는 반드시 공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작 쟁의뿐 아니라 무슨 일에든지 이해가 같은 사람이 상반한 행동을 하면 큰 해를 입는다. 이것을 일반 소작 농민은 깊이 각오하여 일치 행동하여야 할 것이다. 같은 배를 탄 사람은 같이 그 배를 같은 방향으로 운전하여야 빠져 죽지 아니할 것이다.

    2)협동 조합에 대하여
    또 농촌 소작민 경제의 자위책으로 소비 조합을 조직하여야겠다. 근일에 도회지에서도 소비 조합 열이 왕성하나 도회지보다도 농촌에 더욱 필요하다. 농촌에 소비 조합을 설립하고 농구.비료, 기타 생활상 필요한 일용품을 공동으로 구입하여 쓰면 훨씬 싸게 사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외에 문자 보급과 미신 타파에 대해서는 현재도 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 후에도 더욱 왕성히 할 것이나 농민의 미신이라는 것은 그 뿌리가 심히 강하니 너무 급격히 타파하려다가는 성공도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반감을 격성시킬 염려가 있으니 서서히 실제 사건을 포착하여 타파에 힘 쓸 것이다. 라고 하였다.

    <농민대중에 대한 기대와 희망>
    오늘까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또는 농민 자신들이 생각하기를, 농업이란 농촌에서 한갓 농사짓는 한천한 직업으로 알고 농촌을 떠나서 도회지로 모여 가고자 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과거는 오직 자연대로 무의식하게 생각하여 왔으나 우리는 이 농업이란 직업을 가장 신성하게 알고, 또는 자기가 그 직업을 가장 마땅한 직업이라고 선택하였다고 의식하고 농업에 대하여 충실하며 기술의 연구와 증진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될 줄 믿습니다. 또 한 말씀은 농사에 대한 방어책과 농민 생활의 방어책을 강구치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름철에 비가 와서 동둑이 무너지면 온 동일 농민이 힘을 합하여 그 동둑을 막아야 상하좌우에 있는 논과 밭이 손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농사짓는 데에도 이렇게 여러 사람의 힘을 합하여야 하거든 농민 생활에 있어서 정치적 의미를 떠나서라도 반드시 방어책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우리 농촌에는 반드시 무엇이라고 지정해서 말할 수는 없으나 침입할 것이 있으니 그는 우리 농민 대중이 스스로 각성하고 온 힘을 크게 합쳐서 단체적으로 그를 방어할 준비가 있지 않으면 안 될 줄 믿습니다.

    <농민의 고통>
    조선농민사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5주년이 되었다고요. 농민 대중을 위하여 농민들을 각성시킨 노력에 대해서는 경의와 아울러 감사함을 마지않습니다. 조선농민사가 과거에도 조선 농민의 이익을 위하여 애국운동에 공헌이 많았거니와 금후에 있어서도 농민들에게 이런 사업을 더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농민들은 생활에 큰 고통을 받고 있으니만큼 그네가 현시 세상에 여러 가지로 불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농민 속에 들어가서 위대한 노력을 한다 해도 정치적으로 운동이 있기 전에는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자주국에서는 정치적으로 그들을 움직일 것이나 조선은 객관적 정세가 정치적 충돌을 줄 수 없으므로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길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아 생활에 동요가 생기는 그들이니 만큼 역시 모든 것을 경제적 운동을 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그들의 생활은 여지없이 파멸을 당하고 있습니다. 실로 조선농민사는 조선의 유일한 애국 운동 단체이니만큼 그들의 생활을 대표하여 전체적 운동에 가담하도록 충동을 주며 나아가 조직시켜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러한 애국계몽운동은 개화자강파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부터 시작되어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한 민족계몽운동의 개념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의 일부를 빼앗기게 되자 새로이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서 국권회복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게 되엇다. 당시 한국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양면에서 전개되었다. 개항 후 한국민족이 상당 기간 동안 열강의 침입에 대하여 완강한 항쟁을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박탈당한 것은 '힘'.'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는 것은 힘을 기르지 않는 한 매우 어려운 과제였으며, 당시 한국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처음부터 장기전을 전제로 한 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기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력의 장기간 공급능력을 의미하는 '실력'의 배양과 축적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한말 한국민족의 국권을 빼앗아간 일본제국주의의 '실력'과 국권을 빼앗긴 한국민족의 '실력'의 격차를 객관적으로 인식한 한국인들이 자기 민족의 '힘'과 '실력'을 양성하여 궁극적으로 자기 민족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3.신간회 활동과 민족운동

    혼탁한 사상계의 선후책
    - 2천만 민중이 당면한 중대문제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 이것이 우리 조선 사상계를 관류하는 이대 조조입니다. 이것이 서로 반발하고 대치하여 모든 혼돈이 생기고 그에 따라 어느 운동이고 다 뜻같이 진행되지 않는가 봅디다. 나는 두 운동이 다 이론을 버리고 실지에 착안하는 날에 이 모든 혼돈이 자연히 없어지리라고 믿습니다. 경제 혁명이나 민족 해방이 우리에게는 다 필요한 것이나 다만 이것이 본질적으로 융합치 않는다고 반발할때에는 사상이란 도리어 망하게 하는 장본이 될 것이외다. 우리는 지금 동주과우한 격이니 갑이고 을이고 다 지향하는 방향이 있으나 우선 폭풍우를 피하는 것이 급무인 모양으로 공통되는 점을 해결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물론 일조일석에 해결할 문제는 아니외다. 근래에 이르러 사회 운동가들이 민족 운동을 많이 이해하여 가는 경향이 있는 것은 매우 가하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특수한 형편을 보아 이 두 주조가 반드시 합치하리라고 믿으며 또 합치하여야 할 것인 줄 압니다.

    신간회는 1927년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직된 국내 민족주의 운동의 구체적인 모임이다. 1926년 6.10 만세운동 이후에 자극되어,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 공산주의 양자간의 타협에 의하여 민족유일당운동으로서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의 가장 대규모의 합법적인 결사체로 보였지만 항상 일제의 감시와 주목을 받은 단체였다. 신간회의 성립요인을 분석한 이현희 교수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24년 전후 만연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에 압도 되어온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대표기관의 탄생을 열망하고 있었다. 둘째, 국내 사회주의 진영의 활동이 6.10만세를 고비로 점차 퇴조를 면하지 못하자 민족주의 진영과 손잡고 재기하려는 뜻에서 좌우합작을 제의하여 민족유일당을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셋째, 일제는 민족.사회주의진영의 동태 파악과 계보 활동을 예의 추적, 구금하기 위하여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가장된 차원에서 이를 허가해주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간회 규약은 25개조로 되어 있는데 회의 명칭과 사무실의 설치 등을 명기하고 있다. 활동 강령은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고, 단결을 공고히하고,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이었다. 그 뒤 신간회는 비슷한 목적으로 성립된 民興會 등과 통합을 추진하여 이상재와 권동진을 정.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권동진,한용운등 10명을 전형위원으로 뽑았다.
    신간회에서는 합법적이고 타협적인 테두리 속에서나마 활동이 허용되었음을 감안하여, 민족자주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먼저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7월 10일에는 서울지회를 설치하였으며, 지회장은 만해 한용운이었다. 활발한 지회활동을 통하여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자 일제는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한번도 대규모의 전체대회를 개최하지 못하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투쟁목표는 뚜렷하였는데, 이는 구호와 실천강령등에서 엿볼 수 있다. 즉,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을 먼저 천명한 뒤, 언론.집회.결사.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할 것과 청소년.부인 형평운동을 지원할것도 아울러 투쟁의 방향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파벌.족벌주의의 배격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기타 이민을 강력히 반대하면서 재만·재일 동포의 문제와 국제주의도 포함시켰다. 근검 절약과 민족혼을 되찾아 우리 얼의 건재성을 국내외에 과시하여야만 우리 민족은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조사단을 파견함과 동시에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항의하였으나 일제는 냉담하엿다. 이에 이 운동을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 파급시키기 위하여, 광주에 조병욱과 한용운은 비밀리에 다녀온 후 서울에서 광주실정 보고 민중대회를 열고 그 부당성을 규탄하기로 하였다. 1929년 12월 13일을 개최일로 잡고,
    권동진.한용운.조병옥.송진우.홍명희.이관용.김항규.주요한.이원혁등 관계자가 민중선언서를 발표하고 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경찰이 민중대회를 중지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묵살하고 강행하려 하자 일본 경찰은 한용운.조병옥.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 간부 등 40명을 연행, 구속하였다. 그 가운데 한용운과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선고를 받고 복역중 1930년 2월 석방되었다. 신간회는 창립당시부터 좌우익간의 갈등.대립으로 분란을 계속하다가, 좌익계가 우익진영에 기선을 제압당하자 부산지회를 통하여 해소론을 제기하였다. 이에 맛서 한용운은 신간회 해소론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해소론에 반대하고 나섰다.한용운이 삼천리지에 게제한 신간회의 해소운동에 대한 논리는 다음과 같다.

    1)신간회 해소에 반대합니다. 해소론자로부터 그 이유에 대하여 명확한 제시가 없으므로 구체적 비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만, 대체로 시간적 협동이란 것을 분명히 인식하였다면 그의 입으로부터는 해소론이 아니 나와야 옳을 것이겠습니다. 우리가 가설을 지어서 가령 계급선상의 여러 사람들이 신간회를 떠나서 따로 계급적 운동을 한다고 합시다. 그렇더라도 그네들도 똑같이 신간회가 목표로 하는 어느 것을 넘지 않고는 아무 일도 못할 것이외다. 아무 일도 되지 못할 결정적 이치니까.

    2)현재의 신간회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갖는 분이 많겠지요. 혹은 만족한 생각을, 혹은 불만족한 생각들을...... 그러나 대체로 말하며, 불만족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그를 개선하기에 노력할 것이요, 아주 없앤다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충분히 말씀할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신간회 해소문제에 대하여 한용운의 단호한 입장을 이해할수 있을 것같다. 그리고 한용운의 <대협동기관조직의 필요와 가능성> 이라는 혜성지 창간호에 실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도무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간회의 관계자니까 신간회 이외에 무슨 단체를 새로 두자고 할 수도 없고 무슨 말을 하면, 잘못하면 또 오해도 사기가 쉬운 사회이니까요. 그러면 신간회의 장래책에 대하여서라도 말씀하라구요. 그러나, 그것도 어렵습니다. 요전 4주년 기념 때에 나더러 "신간회의 과거와 장래"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여 달라기에 더러 생각은 하여 보았읍니다만 강연도 중지되어 말도 못하였고, 또 무슨 의견이 있다 하여도 문자 발표까지는 아직 유예하겠습니다. 대체로 말하면 신간회는 일부에서 해소론이 일어나지만 분화는 될지언정 아주 해소는 안 될것입니다. 해소론자들이 처음에 신간회에 들어올 때에도 정책상 들어온 것이요, 해소를 주창하는 것도 또한 정책이겠지요. 하여간 앞으로 문제인 즉 퍽 복잡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용운을 비롯한 많은 민족주의 진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함으로써 창립된 지 만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한용운을 위시한 많은 인사들은 민족의 단합과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일제의 철저한 탄압과 방해 공작에 맛서 만해 한용운이 범민족적 표현단체를 건설하여 조선운동으로 이것을 승화시켜 나가야 함을 주장하였으나 끝내 새로운 결실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신간회 해소문제와 범민족적 표현단체 재건설 가부에 대하여 만해 한용운의 견해는 다음과 같기에 그 전문을 소개 한다.

    1)신간회 해소 문제에 대하여
    신간회 해소 문제는 이미 옛날 이야기 같습니다만 신간회 해소는 정당히 한 것이 아닙니다. 혹평으로 말하자면 소위 해소를 성공하였다는 일부의 그들은 착오적 이론과 어떤 충동으로 피동적으로 조선 운동을 그르친 죄과를 범한 것입니다.

    2)범민족적 표현 단체 재건설 가부
    표현 단체 재건설은 필연적으로 결정될 것이고 당연히 조직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기 문제가 있는 것이니 아직은 어려울 것입니다. 계급 운동 무슨 운동 부분적으로 필요하지마는 조선 운동이라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인도에 인도 운동이 있는 것과 같이.라고 하였다. 인도에는 인도 운동이 있는것과 같이 조선에 조선운동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 만해 한용운의 민족정신의 실천운동은 우리 계례와 늘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