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Ⅱ. 한용운 민족정신의 배경

    만해 한용운은 1879년 충청도 홍주(현 홍성군)에서 청주 한공 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신 가문은 누대의 사족으로서 할아버지 영후는 종사품인 훈련원 첨정이었고, 아버지 응준은 종오품인 충훈부 도사였다. 한용운은 6세 때 고향의 서당에 들어가 정규적인 한문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소학> , <통감> 에서 시작하여 18세까지 <사서삼경> 과 <기삼백주> 를 모두 배웠고, 틈틈이 <서상기> , <삼국지> 등의 희곡, 소설, 기타 서적들을 읽었으며, 18세에는 숙사가 되어 동네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가정에서는 엄격한 교육과 사회정의 그리고 애국심의 소유자인 선친 한응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향에 있을 때 나는 선친에게서 조석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으니 선친은 서책을 보시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세우시고, 역사상에 빛나는 의인, 걸사의 언행을 가르쳐 주시며 또한, 세상 형편, 국가 사회의 모든 일을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시었다. 이러한 말씀을 한 두 번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이상한 불길이 일어났고, 그리고, 나도 그 의인, 걸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하는 숭배하는 생각이 바짝났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즉 가정교육은 그의 인간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다음으로 만해의 출가에 대하여서는 각종 자료와 자신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1903년 집을 나서서 속리산과 강원도 오대산을 거친 후 설악산 백담사에서 1905년(당시 27세) 수계하여 승려가 되었다. 한용운은 당시 국내의 상황으로 보아 시골 산속에 묻힐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집을 나와 서울로 가던 중 다음과 같은 심경의 변화를 보이게 된다.

    "전정을 위하여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것과 또, 인생 그것에 대한 무엇을 좀 해결하여 보겠다는 불같은 마음으로 한양 가던 길을 구부리고 사찰을 찾아 갔다."

    이러한 그 자신의 회고와 그의 신분 및 의식, 그리고 시대적 상황을 고찰하면 출가 동기는 궁극즉으로 기존 질서에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위하여 출가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전통사상의 큰 맥을 유교와 불교에서 찾아본다면 한말 유교체제가 한계에 다달았을 때 그 대안을 불교에서 찾는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불교를 통하여 새로운 사상과 질서를 접하게 되었으며 그의 생애에 있어서 대전환의 계기를 만나게 된다. 유학의 한계가 노정되었을 때 지식인의 첫 과제는 이러한 종래의 사유양식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선 초월적 가치관을 축으로 한 사유구조의 해체를 의미하며 동시에 민족의 존립 반영을 위한 근대 지향의 이동적 과제를 수반한다. 이러한 과제를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한용운은 근대 서구사상을 다시 주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한충 더 도약시키는 계기로 삼게 된다.
    그는 정상적인 불교 수업을 받는 한편 건봉사 유학승들을 통하여 <영환지략> 과 <음빙실문집> 등의 서적을 읽게 되고 세계에 대하여 눈뜨게 된다.된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하여 국권이 박탈당한 것을 전후로 하여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국제 현실을 자각하고,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생존의 길은 자강의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의 뒤를 이어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배양운동으로서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된 뒷받침이 되었다.
    한용운도 이러한 경향에 따라 자유 독립의 근세적 이념을 인식하고 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며, 근세적인 역사 인식론을 이해하게 되었다.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뜬 한용운은 다시 하산을 하여 세계만유를 의도하고,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렀으나 정세가 불안정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귀국한 후 참선 생활을 한다. 그는 190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 가서 새로운 경험을 쌓게 된다. 일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신문물을 관찰하고 동경 조동종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하였으며 유학중이던 최 린을 사귄 후 귀국하였다. 그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여 서울 청진동에 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하여 측량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높이려 하였다. 이렇게 넓은 견문을 통하여 변화하는 세계를 알고 근대적 지식을 습득한 그는 한국의 현실 및 한국 불교의 침체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지적하면서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 을 탈고 한다. 불교계혁운동의 상징인 <조선불교유신론> 은 불교의 진리를 해설한 이론서라기보다 한국 불교의 현상을 이론적으로 비판, 개혁하려는 열렬한 실천론이다.이 저서에는 한용운의 모든 정서 즉 교육, 참선,염불당,주지선거등 조선 불교의 현상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전면적으로 집약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 전개될 그의 모든 행동과 사상과 문학의 윤곽이 총체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점에서 <조선불교유신론> 은 한용운 개혁 사상의 집대성적 성격을 지닌다 할 수 있다.

    그는 불교의 철학적 성질를 논하면서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으로 생긴 것이며 현상계도 우리 마음의 반영으로 인식되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마음의 본체는 진여로서 진여가 곧 진정한 자아이며 진아가 자유를 뜻하는 것이다 자유는 현상계의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적 존재이다. 이와는 반대로 부자유는 현상에 구속되는 무명에서 유래한다고 파악하였다. 모든 사람이 생멸하지 않는 진여를 차별없이 소유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고 보았다. 평등이란 시공을 초월하여 얽매임 없는 자유로운 진리이며, 불평등이란 사물 현상이 필연의 법칙에 의하여 제한 받음을 뜻한다고 보았다.

    "만약, 불평등한 견지에서 바라본다면 무엇하나 불평등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며, 평등한 견지에서 바라본다면 무엇하나 평등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평등이란 진리를 지적한 것이지 현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한용운은 인간으로서 자유와 평등사상을 구세주의와 연결시킴으로써 깊이를 더하고 있다. 구세주의란 이기주의의 반대 개념이다.

    그는 불교를 개인의 구복만을 위하는 이기적 종교가 아니라 중생 제도의 자비심으로 가득찬 이타적 종교라고 보았다. 그래서 현실 개혁과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불교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그는 당대 조선 사회의 봉건적인 성격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세계사적 질서 밖에서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여 유신의 이념을 단순히 불교적 측면의 일반적 개혁에 두지 않고 제반 반봉건의 과제 해결과 같은 기반 위에 두고자 하였다.

    한용운은 박한영 등과 함께 1911년 송광사에서 임제종 총회를 열어 이회광 일파의 원종을 일본의 조동종에 합종시키려는 것을 반대하여 조선의 전통적인 임제종을 내세우고 종지 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 경상도와 전라도 사찰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면서 몽매에 빠져 있던 불교계에서도 새로운 시대적 상황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의 강점 이후의 현실을 명확히 인식한 한용운은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망명을 떠난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시도는 뜻대로 되지 않아 다시 귀국하게 된다. 그는 이후 한민족의 독립투쟁 준비기 동안 내적 성숙을 도모하면서 주로 사찰에서 강연과 저술활동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1917년 12월 설악산 오세암에서 견성오도하면서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꿰뚤는 오도송을 남겼다. 이듬해 하산하여 <유심> 지를 창간하여 사회적 활동을 다시 전개하게 되었다. 한용운은 <유심> 지를 창간하면서 주로 청년들의 계몽에 힘쓰는 한편 일본의 신문, 잡지 등을 통하여 세계 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다. 이와 같은 그의 세계 정세의 인식 배경하에서 수도적 역정과 탈수도적 역정을 계속하면서 자아를 확고히 정립하고, 사회 상황을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한용운은 1919년 3.1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가 3.1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출하였던 "조선 독립에 대한 사상의 개요"를 중심으로 하여 유신론에서 이어지는 사상의 발전과 변화를 자유, 평등,평화로 이어지는 민족 독립사상을 고찰하였다.

    한용운은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기 위하여는 생명을 터럭으로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님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을 한계로 삼는 것이므로 약탈적 자유는 평화를 깨뜨리는 야만적 자유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 개념은 유신론에서 논한 자아의 불성에 대한 자각이 그 뿌리가 되어 발전한 것이며, 자유정신은 평화와 평등 및 사회정의의 개념의 기초가 된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 본질로서의 자유와 평등은
    "사회적 부자유와 불평에 무관하게 내면적 혹은 정신적으로만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측면에까지 자기를 실현하게 되며 사회적 부자유와 불평 등에 전투적으로 도전하게 된다."

    따라서 그의 자유정신이 민족의 자존성과 민족의 독립 사상으로 전개됨은 당연하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민족 자존성외에 그 근본을 잊지 못하는 조국 사상이 있으므로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가 오직 무력의 열세때문에 남의 유린을 받아 역사가 단절됨은 참을 수 없다고 논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전통을 단절없이 계승해야 된다고 하는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역사적 사명에 대한 뚜렷한 자각을 가졌으므로 국가는 모든 물질 문명이 완전히 구비된 후에라야 꼭 독립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할 만한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일제가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서 행한 조선교육령이라든가, 한국 역사가 타율적이교 정체적인것이라고 왜곡시켜서 가르치는 등 민족 열등의식을 조장하는 것을 날카롭게 비판한 말이다.
    한용운의 역사 인식은 날카로운 면모가 있다. 그는 유신론에서와 같이 역사는 인류가 몽매 한데서 부터 문명으로, 쟁탈에서부터 평화로 발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당시 세계사적 단계를 분석하여 18세기 이후를 제주국의 시대로 파악하였으며 그 침략적 본질을 갈파하여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즉 침략주의는 몰락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는 강대국 즉 침략국은 세계 평화와 정의를 침략의 구실로 내세우지만 그것은 기만적인 헛소리일 뿐 군국주의는 인류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가장 흉악한 마술사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연합국 측도 준군국주의로 파악하고 제국주의는 인류의 죄악이 평화와 정의를 향하여 끊임없이 진보해 가는 역사의 한 과정 즉 멸망해 가는 한 부분으로 생각하였다. 그 증거로서 민족자결주의의 대두와 전쟁 중에 일어난 독일의 혁명을 들고 있다. 그는 독일의 패배는 독일 인민의 패배가 아니라 군국주의의 패배이며 연합국의 승리가 아니라 독일 인민의 승리라고 보았다.

    이와같이 소수의 지배자에게 다수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민중사관을 갖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현재부터 미래의 대세는 침략주의의 멸망, 자존적 평화주의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평화의 정신은 철저히 비폭력정신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경우에 따라 폭력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상황논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다.

    "어찌 평화를 위한 전쟁이 있겠으며...... 칼이 어찌 만능이며 힘을 어떻게 승리라고 하겠는가? 정의가 있고 도의가 있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그의 비폭력 정신은 철저하게 정의와 인도를 주축으로 하는 자유 평화의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피동적인 입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침략국의 폭력을 근원적으로 부정하여 독립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유신론에서 현실적인 입장에서는 힘이 지배하는 세계임을 인정하던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그의 불교사상에 근거한 공명 정대한 도덕률의 입장에 서게된 것이다. 이 정신 때문에 그는 피해자로서의 복수의 신념에 사로 잡히지 않았고 다만 망국의 원인을 수 백년 동안의 정치와 현대 문명에 뒤떨어진 결과, 자멸한 것이라고 파악하여 반성과 자책을 통한 부단한 노력으로 자강하여야 된다고 보았을 뿐이다.

    한용운은 자유와 평등을 기본 개념으로 하고 인간 생활의 근본을 자유와 평화로 보았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 도덕과 정의에 근거하여 조선 독립선언의 동기와 이유를 논리 정연하게 열거하여 민족 독립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민족운동과 자주정신은 3.1운동으로 나타난다. 민중의 사회 의식이 높아져 당대 사회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1920년 대에는 역동적 농민, 청년 학생, 여성 형평운동 등 주로 사회 운동의 성격을 띤 민족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부분적인 사회 운동보다는 민족적인 차원에서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등의 사회 활동에 참가하여 민족의 자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 조선인들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무한한 고통을 받고 있음은 사실이나 이 고통을 물리쳐 없애려는 태도로 대항한다면 고통은 점점 더할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이 고통의 탈 가운데서 뛰어나와 영적 생활을 계속하여 가면 고통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여 부분적인 현실 사회 문제에 대해서 초월하여 민족이 총 단결하여 자주독립운동을 해 나갈 것을 강조한 것이다.
    1926년에 서울 회동서관에서 발행한 시집 <님의 침묵> 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의 경이적인 사건이었다.
    한용운은 이 시집 한권으로 우리의 옛 전통을 이어받은 마지막 시인이자 동시에 최초의 민족시인이라는 영예를 않았다. 이 시집의 경이적인 점은 그것이 완전히 문단의 권외에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문단적 수준을 헐씬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당시 문단의 유행에 따라 서양 문학의 방법을 배워다가 시를 쓰지 않고 불승으로서의 비젼과 일상 생활적 어법만 가지고 시를 썼으나 그것이 그대로 주권을 빼앗긴 민족적 현실의 고통과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가장 순화된 시적 표현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민족, 자유, 불도에 대한 염원이 혼합되어 시집 <님의 침묵> 은 탄생되어진 것이다.

    1927년 2월 좌우 분열 해소를 열망하고 일제에 대하여 철저히 비타협적인 그는 민족단일운동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 겸 서울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깊어졌으며 사회주의, 노동문제, 농민문제에 대한 견해도 심화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처음에 의도한대로 성과를 얻지 못하자 신간회를 적극 탄압하였고, 또, 좌익 진영이 해소론을 주장하여 1931년 신간회는 해체되었다. 같은 시기인 1927년 5월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가 조직되어 여성운동과도 간접적인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그는 신간회 활동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광범위하게 접하게 되면서 점차, 농민, 여성의 사회운동에 대하여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겠다. 이와같이, 일련의 사회운동을 계기로 한용운의 자주 독립 사상, 자유 사상과 민족사상이 더욱 확고해져가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신간회 해소를 경험한 뒤 조선인 전체의 운동을 위해서 단순히 민족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 각부분의 민중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주로 소작농민과 여성해방 문제였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사상에 입각해 있던 한용운도 사회적인 불평 등의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민족운동을 조선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1931년 6월에는 <불교> 지를 인수하여 많은 불교 논설을 통해 반종교운동이 팽배하고 있는 세계적인 정세 속에서 또한 식민지 하의 조선의 현실에서 불교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 하려고 노력하였다.
    1935년 이후 그는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을 연재하고 잇달아 조선 중앙일보에 역시 장편인 <후회> 를 연재하다가 해당 신문의 폐간으로 인하여 50회로서 중단하였으며 그리고,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박명> 을 장기 연재하여 만년의 문학혼을 여실히 발휘하였다. 그 이외에도 많은 잡문을 집필하여 신문, 잡지를 통하여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굽힘없이 말하였으며 혹은, 일제의 사회 정책을 통박하고 혹은, 꺼져가는 민족정기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청순한 시혼을 가다듬어 스스로의 정회를 호소하기도 하면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이후로 그는 주로 후배 동지를 지도하는 한편 때로는, 학병징집을 통절히 반대하는 등 지난 날에 못지 않는 활동을 꾸준히 계속하였다. 그러나, 한용운은 민족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尋牛壯에서 조용히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