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공판 기록에 나타난 3 1정신

    한용운이 3 1 만세운동에 주동자로 거사 당일의 활약상과 옥중 투쟁과 공판 기록에 나타난 자료를 통하여 독립정신의 일면을 살펴보자. 먼저 거사 당일의 자료를 검토해 보자. 즉,

    기미년 3 1 오후 2시 태화관에 민족 대표 29인 참석하여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때 태화관 주인 안순환(安淳煥)이 깜짝 놀라 안절부절하니 좌중에서 일경에 전화로 알리도록 일러주고 이어 달려온 종로 경찰서 70여 명의 사복 차림 순사들이 두 겹 세 겹으로 명월관을 포위하는 가운데 . 37)

    라고 이갑성 옹의 1969년의 1월 1일 《동아일보》 회고담에 적고 있다.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과 기념식 자체가 성대히 치러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린의 사회로 선언식을 가졌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이 축사 겸 만세 삼창을 선창하니 기념식은 간단히 치러졌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해서 한 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다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38)

    이때 탑골 공원에 모여있던 학생들과 청중들은 민족 대표가 오지 않자 자진하여 시위대를 형성하여 탑골 공원 문을 박차고 종로 거리로 시위 행렬을 이루었다. 시위대의 뒤를 따르던 어느 소학생이 총독부의 순사한테 쫓기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광경을 마포 형무소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바라본 만해 한용운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지금은 벌써 옛날 이야기로 돌아갔습니다마는 기미운동이 폭발될 때에 온 장안은 ###### 소리로 요란하고 인심은 물 끓듯할 때에 우리는 지금의 태화관 당시 명월관 지점에서 ## 선언 연설을 하다가 ###에 포위되어 한 쪽에서는 연설을 계속하고 한 쪽에서는 ##되어 자동차로 호송되어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입니다. 열 두서넛 되어 보이는 소학생 두 명이 내가 탄 자동차를 향하여 ##를 부르고 두 손을 들어 또 부르다가 ##의 제지로 개천에 떨어지면서도 부르다가 마침내는 잡히게 되는데, 한 학생이 잡히는 것을 보고도 옆의 학생은 그래도 또 부르는 것을 차창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 학생들이 누구이며, 또 왜 그같이 지극히도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보고 그 소리를 듣던 나의 눈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비오듯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그 소년들의 그림자와 소리로 맺힌 나의 눈물이 일생에 잊지 못하는 상처입니다. 39)

    1932년 1월 8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평생 못 잊을 상처〉라는 제목의 글 전문이다. 기미년 만세운동이 지난 지도 13년이 지났고 일제가 조선인을 회유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조선인의 혼을 짓밟던 시절, 만해 한용운은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과감히 펜을 든 것이다. 여기에서 # 표시의 공난을 단어를 찾아 순서대로 넣어보면 ######는 대한독립만세요, ##는 독립이요, ###는 경찰부요, ##는 체포요, ##는 만세다. 그리고 ##는 경찰이다. 누가 읽어도 능히 알 수 있는 ### 표시로 말 없는 말을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이것을 훗날에 만해의 첫번째 눈물이었다고 회고하는 인사 40)들이 있고 보면 만해의 강직하고 굳은 절조와 대쪽 같은 의지를 연상시키는 일면이다.
    만해 한용운은 마포 형무소 안에서 스스로가 정한 옥중 투쟁 3대 원칙(①변호사를 대지 말것 ②사식을 취하지 말 것 ③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지키기 위하여 면벽 참선에만 마음을 쓸 뿐, 일제의 심문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잔혹한 취조가 시작되면서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참회의 자술서를 쓰는 동지들을 향하여 만해는 "나라 잃고 죽는 것이 서럽거든 당장에 취소하라"고 불호령 41)을 내리면서 무궁화 한 그루 심지 못하는 조국 강산이 그리워 철창에 떠오르는 달을 쳐다보며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내 나라에 비췬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췬 달아
    저 달 속 계수나무 베어내고 무궁화 한 그루 심으고저
    애끓는 호곡의 소리다. 무궁화 한 그루 심을 우리의 조국 땅이 그리웠다. 민족의 자존은 우리의 국토에서 우리의 민족이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빼앗긴 땅, 그 땅에 다시 무궁화 한 그루 심을 날을 고대하며 만해는 자유의 꽃송이를 가꾸고 키워야 한다고 다시 다짐하는 일면을 보이고 있다.

    농산의 앵무새는 말도 잘하는데
    그 새만도 못한 이 몸 부끄러워라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이라면
    이 금으로 자유의 꽃을 몽땅 사고파라 43)

    만해 한용운이 남긴 옥중 시는 이외에도 여러 편 44)이 전하고 있다. 한용운은 법정에 서서 당당히 자신의 포부를 밝히면서 '독립은 민족의 자존성'임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즉,

    문: 피고는 왜 말이 없는가.
    답: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인가. 나는 할 말이 많다. 종이와 펜을 달라. 45)

    고 시작된 옥중 공판 기록을 살펴보자..1919년 3월 11일 경무총감부에서

    문: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계속하여 어디까지든지 할 것이다. 반드시 독립은 성취될 것이며, 일본에는 승(僧)에 월조(月照)가 있고 조선에는 중에 한용운이 있을 것이다. 46)

    라 하고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문: 이 선언에는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폭동을 선동한 것이 아닌가.
    답: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 사람은 한 사람이 남더라도 독립운동을 하라는 것이다.
    문: 피고는 금번 계획으로 처벌될 줄 알았는가.
    답: 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 데 힘을 다한 것이니 벌을 받을 리 없을 줄 안다.
    문: 피고는 금후로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47)

    라 하고 《동아일보》 1920년 9월 25일자 신문에 전하는 한용운의 공소 공판기에는

    문: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은 어떠한가.
    답: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나라든지 제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수백년 동안 부패한 정치와 조선 민중이 현대 문명이 뒤떨어진 것이 합하여 망국의 원인이 된 것이다. 원래 이 세상의 개인과 국가를 막론하고 개인은 개인의 자존심이 있고 국가는 국가로서의 자존심이 있으니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로 받지 아니하니, 금번의 독립운동이 총독 정치의 압박으로 생긴 것인 줄 알지 말라.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압박만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지 않고자 하느니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라. 4천년이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까지든지 남의 노예가 될 것은 아니다. 그 말을 다하자면 심히 장황하므로 이 곳에서 다 말할 수 없으나 그것을 자세히 알려면 내가 지방법원 검사장의 부탁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글을 감옥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갖다가 보면 다 알 듯하오. 48)

    문: 그 서류를 보고 독립에 찬성을 하였나.
    답: 그것을 보고 찬성한 것이 아니라 다소 나의 의견과 다른 점이 있어 개정한 일까지 있소. 49)

    라 하였다. '독립은 민족의 자존성'이라고 강조하는 한용운의 맹렬한 독립론이 민중의 가슴을 움직여 나갔다. 만해 한용운의 공소 공판기는 당시 《동아일보》 50) 사회면에 '한용운의 맹렬한 독립론'이라는 톱기사가 되어 보도될 정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자후(獅子吼)였다. 만해 한용운은 옥중 답변을 통하여 더욱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더 나아가 출옥하는 날 기자들의 질문에 "지옥에서 극락을 구했다" 51)는 만해의 표현은 걸림없고 무애자재한 보현행의 이상을 실천하는 보현보살의 화현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민족의 자존성을 강조하는 길이요, 민족이 살아가는 영원한 길임을 확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