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맺 는 말

    위에서 만해 한용운의 생애와 논저들을 통하여, 그의 독립운동에 나타난 자유의지가 '자유사상'임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는 자주 독립과 평화 평등이 수반되어야 함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자주 독립과 평등 평화는 가만히 앉아서 누가 주기를 기다린다든지 때가 되기를 기다려서는 아니되며, 우리가 뜻을 세우고 계획을 도모하며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의지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기에 만해 자신은 민족의식의 발로로써 일생 동안 호적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이는 자신은 엄연히 조선인이기 때문에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가지는 민적(民籍)을 가질 수 없다는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총독부를 지어 강압적인 총독 정치를 시행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한 만해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무수한 탄압으로 억눌렀지마는 만해의 의지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서대문 형무소를 제 집 드나들 듯한다 해도 아니됨에, 일제는 정책을 바꿔 만해에게 "당신이 침묵을 지키고 가만히만 있으면 전문학교 교장으로 삼겠다"는 회유책으로 달콤한 유혹을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우민(愚民) 정책으로 인하여 대학이라고는 자신들에 필요한 인재 관리 양성에 필요한 기관으로써 '경성제국대학' 하나만을 두고 그 밖의 대학을 설립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오직 전문학교만이 있어서, 전문학교 교장이란 오늘날 대학 총장과 같은 지위로서 지식인에게는 가장 영예스러운 자리였다.
    그러나 만해는 이러한 교섭을 물리치면서 대답하기를 "꿩의 병아리는 아무 집에 길러도 닭이 될 수 없고 닭의 병아리는 아무리 산에 갖다가 길러도 꿩이 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조선인은 언제 어디서나 조선인이지 일본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만해는 일생 동안 가난과 탄압 속에서 집 한칸 없이 지내던 중, 동지와 제자들이 의견을 모아 성북동에 심우장(尋牛壯)이라는 집을 하나 짓게 되었다. 그런데 문은 남향으로 내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나 이 집의 문은 북향이었다. 그것은 남향으로 문을 내면 일본 총독부를 마주 대하게 되니 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 얼마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의 강렬한 작용인가? 만해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만히 침묵만 지키면 휼륭한 대우를 보장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해는 이를 거부하고선, 민중 속에 뛰어들어 말로써 글로써 행동으로써 민족운동을 하면서 수많은 고생과 역경 속에서 일생을 지냈다.
    만해가 그의 심경을 읊은 한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농산의 앵무새는 말도 곧잘 한다는데 농山鸚鵡能言語
    그 새보다 훨씬 못한 이 몸이 부끄럽다. 愧我不及彼鳥多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이라면 雄辯銀與沈默金
    그 금으로 자유의 꽃 모두 사리라. 此金買盡自由花

    이 얼마나 비분강개한 술회인가! 첫 구절에서 앵무새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는데, 자기는 민족운동가로서 독립이니 자유니 하는 말만 하면 탄압을 하고 감옥에 갇히니, 자신의 신세가 앵무새만도 못한 비참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둘째 구절은 침묵을 지키고 가만히만 있으면 전문학교 교장이라는 영예스러운 지위를 차지하고 편히 살 수 있음에도, 자유를 잃은 겨레를, 주권을 빼앗긴 조국을 두고 그냥 차마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침묵이라는 금덩어리를 버리고 민중 속에 들어가서 웅변이라는 은으로써 시로 소설로 설교로 행동으로 조직으로 민족운동을 하여 이 강산에 다시 자유의 꽃을 피우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지를 가지고 있던 만해는 8 15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에 그렇게 원하던 조국의 해방과 민족의 자유를 보지 못한 채, 이 강토에서 그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갔다. 이 얼마나 그를 위해서나 민족을 위해서나 서운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그는 갔지만 그의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와 평화를 존중하는 정신은 이 겨레 이 강토와 함께 영원히 빛나리라. 그리고 이는 수호되어져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