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기타 저서에서 본 자유사상

    만해 한용운의 수상 논설집으로 《심우장만필 尋牛莊漫筆》이 있다. 이는 만해의 만필(漫筆) 회고(回顧) 기행 수양 시론 등을 모아 엮은 것으로, 편언(片言)들이지만 한결같이 자유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인조인 人造人〉 중에

    만근(輓近)에 흔히 신문지를 통하여 보면, 서양에서는 인조인을 연구한 지가 오래고 제작한 것도 어느 정도까지 성공하여서, 인조인이 말도 하고 기계도 부린다 하거니와 .
    하는 전제를 하고서, 끝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그러면(인조인이 많아지면) 그 많은 사람이 이 조그마한 지구에서는 다 살 수도 없는 일이요, 식량의 부족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인조인과 자연인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요, 우종인 인조인에게 자연인이 패할 것은 점치지 않고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인이 스스로 인조인을 만들어서 도리어 그들에게 멸망할 것이니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그러면 인조인을 연구하는 정력을 옮겨서 인조 식료를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식료는 질뿐이요, 생명이 없는 것인즉, 생명 있는 인조인보다 연구 완성하기가 쉬울 것이요, 그것이 성공되어서 무제한으로 생산한다면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군축 회의(軍縮會議)니 무어니 무어니 하는 것들이 역사적 재료로써나 필요가 있을는지 모르되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요, 소위 인류의 영원한 평화라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할 것이다.

    하였다. 이는 기계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서, 오늘의 기계 발명이 인간의 자유와 평화에 역점을 두지 않았음을 심각하게 경고한 것이라 하겠다.

    〈반성〉에서는

    망국자로서 정복국만을 원망하는 것은 정복국이 자국보다도 더욱 자멸하기를 기다릴 뿐이요, 불행자로서 행운의 인(人)만을 원망하는 것은 행운의 인이 자기보다도 더욱 불행히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러면 그러한 자의 희망이 달성되기도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가사(假使) 그러한 일이 있어서 정복국이 자멸하고 행운의 인이 불행히 된다 해도, 망국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이상 제2, 제3의 정복국이 다시 나게 되는 것이요, 자기 불행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자기는 의연히 불행의 경애(境涯)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반성 자책하지 못하는 결과일 것이다.

    반성하는 자는 새로운 각오가 있는 것이요, 자책하는 자는 향상의 노력이 있는 것이다.
    자각과 노력은 만사 성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은 우리 조국의 주권을 앗아간 적국을 원망만 하지 말고 우리가 국가의 주권을 잃게 된 원인을 반성하고 자책하여 적의 나라보다 더 노력하여 강력하고 분명하여 졌을 때에 우리 겨레의 자유와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을 평소에 가지고 있던 만해는 어느 강연회에서 우리의 무지를 반성하고 자책하는 웅변으로서 대중을 향하여 외치기를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라고 청중에 묻고선 한참 후에 스스로 대답하기를 "그것은 왜놈들이요" 하였다. 이는 왜놈들이 우리의 주권과 자유를 빼앗아갔으니 그보다 더 더럽고 무서운 존재는 없다는 통분의 절규라 하겠다. 그러자 왜경들이 강연을 중지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만해는 왜경들을 제지하며 말하기를 "남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왜 그렇게 성급하오"라 하며 다시 청중들을 향해 묻기를 "왜놈보다도 더 더럽고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 하니 청중들이 이에 묵묵부답이자 만해 자신이 더 큰 소리로 외치기를 "그것은 우리의 무지요"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우리는 일본보다 현대적인 정치 제도 과학 모든 분야에서 뒤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못나서 주권을 뺏기고 자유를 박탈 당하였음을 일깨워 민중들이 더 분발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해는 또 〈망양보뢰 亡羊補牢〉에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말은 조선의 속언(俗諺)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때가 늦다는 뜻이요, 하여도 쓸 데 없다는 뜻이다.
    물론 소를 기르는 사람이 미리 외양간을 단속하여서 소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전의 준비이다. 그러한데 미리 단속하지 아니하고 내버려 두었다가, 구경(究竟) 소를 잃은 뒤에 후회하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선견(先見)의 부족으로 늦지 아니한 것은 아니로되, 그것이 쓸 데 없는 일이라 하여서 고치지 않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한 번은 늦었지마는 두 번은 늦지 말아야 할 것이요, 하나는 잃었을지언정 둘은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일보의 차질로 만리장정(萬里長程)을 퇴보하는 것은 아니요, 일시의 과실로 백년 대업을 단념하는 것은 아니다.
    칠전팔기(七顚八起)하는 것이 용자(勇者)요,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것이 철인(哲人)이다.
    한 번 소를 잃었다고 다시 외양간을 고치지 아니하여 제2, 제3의 소를 잃는 것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리요.

    하고, 《전국책 戰國策》에 있는 '토끼를 보고 개를 돌아보아도 늦지는 않다 (見兎而顧犬 未爲晩也). 양을 잃고 나서 우리를 고치는 것도 더디지 않다 (亡羊而補牢 未爲遲也)'라고 인용한 후 결론 짓기를

    이 세상에는 처음부터 소를 하나도 잃어 보지 아니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소를 잃은 뒤에는 곧 외양간을 고쳐서 다시 잃지 않는 자가 현명한 사람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소를 잃지 아니한 사람이 없건마는, 외양간을 고치려는 생각은 적은 듯하다.
    그러하고 다시는 소를 기르지 아니하려는 듯하다. 그러면 소를 쓰게 되는 때에는 어찌 하려는가. 오호! 망양(亡羊)의 과실보다 보뢰(補牢)치 아니하는 죄과가 더욱 큰 것이다.
    하였다.

    이는 당시 우리가 조국의 주권, 겨레의 자유라는 '소'를 잃고서는 다시 외양간을 고치는 작업 즉, 소를 다시 찾아 기르고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장 절실히 요청됨을 비유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사후의 선견자 事後의 先見者〉에서는

    선견이라면 사전에 미래를 통찰하는 식견을 말함이어서 사후(事後)의 선견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마는, 어쩐지 우리 조선에는 사후의 선견자가 많은 것이다.
    사후의 선견자라는 것은 무엇을 이름인가. 일이 지나간 뒤에 '나는 그럴 줄을 알았다'는 것이다.
    라고 하고 그 구체적인 사례로써 다음과 같이 열거하며 통탄해 했다.

    신간회(新幹會)가 실패한 뒤에 신간회의 조직은 조선운동으로서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하였은즉, 성립 당시부터 미구에 실패할 것을 알았다는 유물 변증법적(唯物辨證法的) 논리학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면, 만주의 국세(局勢)가 일전(一轉)한 후에 동양적으로서의 조선인의 지위가 어찌 될 것을 만주 사변 전부터 예측하였다는, 소위 정치가가 많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선인의 과거운동이 변증법적이 아니며, 세계 대세를 모르는 망동이었으며, 모든 운동에 참가하지 아니하고 안구보처자지계(安軀保妻子之計)만을 위하여 양지 쪽의 안전 지대만을 찾아다니며 유공불급(唯恐不及)하게 정적(靜的) 요동을 하던 자기네가, 가장 현명하게 시세를 통찰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임(自任)한다.
    그렇다면 신간회의 조직이 과오를 범하여서 미구에 실패될 것을 알았다면 왜 유물 변증법에 적합한 비신간회(非新幹會)를,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조직하여서 조선운동으로써 성공을 기하지 아니하였는가. 유물 변증이라는 것은 실패에만 적용되고 성공에는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또 만주를 중심으로 한 동양적의 환국(換局)을 선지(先知)하였다면, 왜 일찍이 대세에 적합한 조선운동을 일으켜서 조선인의 향상을 꾀하지 못하였는가.

    하고, 이어서 이러한 무리들을 크게 경책(警策)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의 무리로, 자기를 속이고 사회를 속이려는 소지소책(小智小策)의 무리여서 족히 책할 것이 없거니와, 그들이 다수인지라 동성상응(同聲相應)하고 동악상당(同惡相黨)일 뿐 아니라, 일견영(一犬影)에 만견(萬犬)이 폐성(吠聲), 엄연히 한 당류(黨類)를 이루게 되느니, 그것이 실로 적지 아니한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하고,

    폼페이의 폐허를 본다고 로마의 영화를 웃을 수는 없는 일이요, 만리장성의 황퇴(荒頹)를 본다고 진시황(秦始皇)의 우도(愚圖)를 찡그릴 것은 못된다. 무료한 시간에 부단의 흥폐(興廢)를 생각할 때에 폼페이 아니될 것이 어디이며, 만리장성 없을 때가 있으랴. 그보다도 어느 때에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화산이 터질는지도 모르는 것이요, 태양의 흑점이 멀어져서 광명이 멸망될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라는 역사적 예증을 들어서 결론 짓기를,

    그러나, 그렇다 하여서 전도를 비관하고 공수대사(拱手待死)하는 사람은 천하 고금을 통하여 하나도 없는 것이다.
    자기의 생명이 백년을 넘어가지 못할 것은 번연히 알면서도, 쉬지 아니하고 오히려 만년 대계를 꾀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미래의 실패를 비관하여서 스스로 묘혈(墓穴)을 팔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사회는 성패로 계속되는 것이다.

    어느 역사에서 성패가 없는 사회를 보았으며, 흥망이 없는 국가를 보았는가. 그렇다면 성패라는 것은 사회의 생명이어서 차라리 당연한 이치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可)하다'는 말을 사후 선견자류(先見者流)는 알 바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 만해는 〈반구십리 半九十里〉라는 글 중의 시조에서

    백리(百里)를 가려면 구십리가 반이라네.
    시작이 반이라는, 우리들은 그르도다.
    뉘라서 열나흘 달을 온달이라 하더뇨.
    하였다. 이 시조는 서양 격언과 우리나라 격언을 비교하여 소재로 삼은 것으로서 만해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러면 서양 사람의 서양 사람 된 것과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 된 것, 곧 정치 경제 학문 지식 산업 예술, 기타 모든 것으로써의 서양인과 조선인의 차이, 다시 말하면 조선인의 모든 것이 서양인의 그것만 못한 것은, 그 원인을 추구(推究)할 때에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가 없으나, 그러나 이상 속언의 한 말로 그것을 변단(辯斷)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는 것이다.

    백리를 가는 자가 구십리로 반을 삼는 것은 백리의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최초 일보의 초심(初心)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성의 용진(誠意勇進) 그대로 진행을 계속하여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쉬지 않는다는 의미요, 시작이 반이라는 것은 시작만 하여 놓으면 벌써 반성(半成)된 셈인즉, 완완(緩緩)히 하여도 좋고 휴식 혹은 중지하여도 무방하다는 의미다.
    하여 초지(初志)를 끝까지 관철하지 못하는 촌진척퇴(寸進尺退)하는 자, 일을 시작만 하여 놓고 끝까지 하지 않는 유시무종(有始無終)하는 자들을 경책하면서, 〈반구십리 半九十里〉에서 펴기를

    지사(志士)라는 것은 일정한 입지(立志)가 있는 사람을 이름이니, 즉 국가 민족 사회를 위하는 입지라야만 지사라 하느니, 지사라는 것은 위무불능굴(威武不能屈) 부귀불능음(富貴不能淫)이어서 백인(白刃)을 가도(可蹈)며 작녹(爵祿)도 가사(可辭)하느니, 가살(可殺)이언정 불가욕(不可辱)인 것이다.
    산하(山河)가 아무리 험하다 할지라도 지사가 가지 못할 땅은 없고,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 할지라도 지사가 서지 못할 때는 없는 것이다. 지사는 자기의 입지가 공간이요 시간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세계요 생명이다. 지사의 앞에는 천당도 없고 지옥도 없으며, 군함도 없고 포대(砲臺)도 없는 것이다. 풍우여회(風雨如晦)에 계명불이(鷄鳴不二)하고 대침(大浸)이 계천(*天)에 지주불이(砥柱不移)하느니, 도도(滔滔)한 세고(世故)가 아무리 다단(多端)하다 할지라도 지사의 뜻은 불을 따라서 하지도 않지마는 물을 따라서 흐르지도 않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